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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김안녕 Sep 09. 2020

4. 집이 싫어 가출 한 15세 소년

골방 김안녕 과거 특선, '나는 왜 살았을까?' - 4편

"많이 힘들었겠구나. 근데 여기에는 더 사정이 딱한 사람들도 많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고. 너는 기회가 있으니 한번 다시 돌아가 보는 건 어떠니?" - 가출청소년 쉼터 선생님께서 면담하며 해주셨던 말씀.



 나는 독립하기 전까지 가족과 단 한순간도 떨어져 살아 본 적이 없다. 머리가 크기 전까지는 온 가족이 한 방에서 모여 잤고, 머리가 꽤 큰 이후에는 부모님께서 집에서 학원을 하시면서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가족들과 붙어살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것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우리 가족을 괴롭게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서로 사랑하는 애인도 붙어 있으면 쉽게 질리고 가끔씩 봐야 서로를 바라는 마음이 애틋해지는 법. 하물며 가족이라고 다른 것이 있겠는가! 사랑해서 붙어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로의 관계에 독이 된 듯한 느낌이다.




  부모님께서 집에서 학원을 하시게 되면서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내 일거수일투족이 학원생들에게 노출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교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현관부터 학원생들의 신발로 가득 차 있었고, 집 안은 학원생들이 떠드는 소리, 부모님께서 학원생들을 가르치는 소리 등으로 왁자지껄했다. 집은 우리 가족의 생활공간인 방 2개를 제외하고 모두 학원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거실을 통해 방으로 들어갈 때면 거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학원생들의 시선은 온통 나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이를테면 '아, 원장 선생님의 아들이구나!' 같은 관심에서 우러난 시선이랄까.

 

이사한 집 사진이지만, 대충 이런 분위기이다.



  방에 들어간 이후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노래를 듣거나, 컴퓨터를 하면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와 학원생들의 공부 집중에 방해가 된다는 사유로 건들 수가 없었고, 샤워를 하려면 문 밖으로 속옷, 수건 같은 것들을 들고나가야 하기 때문에 집중되는 그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또, 밥이라도 먹을라고 치면 음식 냄새가 학원생들의 코로 스며 들어가는 순간 학원생들은 미친 하이에나  마냥 '선생님! 어디서 음식 냄새나요! 배고파요! 저도 주세요!' 하며 광기를 뿜어내곤 했다.


 제일 곤란한 것은 볼일을 보는 것이었는데, -조금 더러운 이야기지만- 일을 보다 보면 방귀가 큰 소리로 나올 때가 있었는데,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온 학원생들에게 내가 볼일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홍보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된 이후로 볼일조차도 신경을 쓰며 봐야 하는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이러니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부모님께서 나에게 내주신 숙제하기, 곧 들어갈 부모님의 수업 미리 예습 해두기 정도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집이 휴식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공부 지옥 속에 사는 듯한 기분을 매일같이 느끼며 살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나니 나에게 가장 절실해졌던 것은 '나만의 공간' 이였다.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그러한 공간이 이 세상에 나에게 단 1평이라도 주어진다면.


 한창 사춘기였던 15세 소년은 도저히 이런 생활을 버틸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코드네임 '이 지옥에서 탈출한다!'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작전은 간단했다. 부모님께서 수업을 하고 계시는 사이 당시 유행했던 키플링 백팩 -작은 털북숭이 고릴라 키링이 달려 있는- 에 짐들을 재빠르게 쑤셔 담기 시작했다. 우선 팬티 세장, 티셔츠 하나, 반바지 하나, 추울 때 입을 가벼운 겉옷 한 개, 양치 세트, 어제 먹다 남은 햄버거 한 개, 핸드폰, 그리고 돈 될 만한 것들 -이라고 해봐야 값어치 떨어지는, 나에게만 소중 한 물건들을 담았었다-. 이렇게 담고 나니 작은 가방은 꽉 차고 말았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키플링 가방. 내 가출 작전의 소중한 짐가방이 돼주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혹여나 부모님께서 누가 봐도 가출하는 사람의 물건을 챙기는 나의 모습을 보진 않았을까 싶어 주변을 살펴본 뒤 조심스레 문 밖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두근거림이 아닌 새로움을 맟이하는 두근거림이었다.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길인데 어쩜 그리 새로워 보이던지!




 동네를 벗어나서 지하철역 앞에 도달했고, 미처 행선지를 정하지 않았던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단 한 번도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서울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서울은 어떤 곳일까?' 하는 일종의 모험심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 서울 어디론가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고 '첫 가출'을 시작했다. 첫 목적지는 잠실이었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가 성남 수진에 위치해 있었는데, 어른들이 '잠실 땅값이 비싸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환승 후 2호선을 타고 잠실역에 내렸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서울 공기는 너무나도 맑고 상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하철 역사 공기가 얼마나 맑았겠냐만은-. 설레는 마음으로 역사 밖으로 나오니 높디높은 빌딩들이 저무는 해로 인해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전경이 어디 있었겠는가.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내딫은 소년의 마음 또한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정확한 이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의 주황색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도 주황색을 좋아하나 보다. 출처: 연이원 네이버 블로그




 하지만 15세 소년이 가출하면서 겪은 서울은 결코 주황빛이 아니었다. 본지에 적으면 내용이 너무 길어져 추후 외전에 옮겨 적겠지만, 첫날 묵은 찜질방에서 중년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지하철역에서 돈이 없어 사 먹은 유통기한 지난 천 원짜리 샌드위치에 탈이 나기도 하고, 택시 기사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으며 장대비가 내리는 강남 한복판을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노숙할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런저런 시련들을 겪고 가출한 지 4일째 되는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강남 한복판에 있는 ATM기 구조물에 들어가 잠을 청하다가 경고음과 함께 슬레이트가 닫히는 것을 보고 뛰쳐나온 후, 나는 그제야 정착할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15세 소년이 몸뚱이 하나만 들고 돌아다니기에는 서울은 따뜻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를 받아줄 곳을 추려보니 세 군데 정도가 나왔다. 교회 -잡일이라도 도우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베풂을 받지 않을까 싶었다-, 숙식 제공하는 주유소, 그리고 가출청소년 쉼터. 하지만 사회를 너무 물로 봤던 탓일까. 교회에서 쫓겨나고 주유소에서 거절당하며 마지막으로 내가 향한 곳은 강남 어딘가에 위치한 가출청소년 쉼터였다.


전국에 약 134개의 쉼터가 운영 중이라고 한다.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청소년 분들은 꼭 방문해보시길.




 그날도 비가 장대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지도상에 위치를 기억해두고 출발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쉼터를 찾을 수 없어 한참을 비를 맞으며 헤맸다. 그렇게 찾아낸 쉼터는 빨간 벽돌 주택가 사이에서 다른 주택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며 조그마한 간판을 두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참을 비를 맞으며 돌아다녔기에 바로 들어갔을 법도 한데, 정확한 이유는 기억 안 나지만 도착해서도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였던 것 같다. 아마 그때의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실패의 맛을 겪었기에 냉큼 혀부터 내밀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시간 정도를 서성이고 있자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서른 남짓 정도 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리곤 나에게 묻는다. "쉼터 왔니? 들어와." 아마 한참을 서성였던 나의 모습이 밖에서도 보였나 보다. 꼬락서니도 명백한 거지꼴이니 가출 청소년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들어간 쉼터는 일반 가정집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일반 2층 주택이었고, 다만 다른 것은 여러 명의 사람이 생활하는지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이 양이 많고 다채로웠다는 것 정도. 이윽고 나를 쉼터로 들여보내 준 청년이 말했다. "비 엄청 맞았네. 못 씻었지? 2층에서 샤워할 수 있으니까 우선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내려올래?". 그리곤 나에게 수건 두장과 간단히 갈아입을 옷을 쥐어 주었다. 세상에, 온수가 사람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줄 줄이야! 온수가 내 몸에 닿기 시작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이때 이후로 나는 사우나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니 주방에서 그 청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밥은 먹었니? 지금 밥시간이 지나서 차려줄 건 없는데, 컵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줄게." 라며 신라면 컵을 하나 꺼내고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마침 하루 넘게 굶은 참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전기포트의 물소리가 그렇게 기다려졌던 적이 있었는지. 이윽고 뜨거운 물이 올라가 김이 펄펄 나는 컵라면은 내 앞에 두어졌고, 청년의 눈치를 보다가 "먹으면서 이야기해도 돼."라는 말을 듣고는 허겁지겁 컵라면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컵라면이 아닐까.


 청년은 내가 컵라면을 거의 다 먹어 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봐 주었다. 슬슬 배가 불러가 먹는 속도가 늦어지자 그제야 "어쩌다가 여기로 오게 되었니?" 라며 물었다. 나는 아마 15년을 살면서 그 질문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의 이야기들을 토해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청년은 단 한마디도 없이 "응, 그래" 정도의 반응만 해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이윽고 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청년이 나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힘들었겠구나."


 그 여섯 어절의 문장이 어쩜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울려놓을 수 있는지!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나 자신도 당최 이해하지 못할 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꺽꺽거리며 우는 나의 모습을 보고 청년은 "근데 여기에는 더 사정이 딱한 사람들도 많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고. 너는 기회가 있으니 한번 다시 돌아가 보는 건 어떠니?" 라며 말을 건넸다. 이미 "힘들었겠구나"에 평생 받을 위로를 받은 나는 무장해제가 되었고, 돌아가겠다고 말한 뒤 청년에게 부모님의 연락처를 스스럼없이 전달했다.


 그렇게 부모님께서 나를 데리러 오시게 되면서 나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출 이후의 생활은 이전보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잡초마냥 잘 자라 이렇게 컴퓨터 앉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 고달프거든 이 영상을 한번 봐보길. 조금은 괜찮아 질 것이다. https://youtu.be/Hp5T39c2qbo


 얼마 전 커뮤니티에서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 중년 남성을 경찰들이 제압하지 못해 곤혹을 겪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한 청년이 중년 남성을 끌어안으며 귀에다 대고 "이제 그만하세요, 선생님. 괜찮습니다" 등의 말을 해준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깜짝 놀랐던 중년 남성의 태도는 이내 누그라 들고 "내가 말이야.. 내가 말이야.." 하는 말을 반복하며 청년의 포옹을 받아들인 채 흐느끼기 시작한다.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마 누구나 마음속에 흉터 몇 개씩은 담아 두고 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상처로부터 받은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 몸부림친다. 제발 도와달라고, 알아달라고, 내가 너무 아프다고. 마치 영상 속의 중년 남성이 지하철에서 난동을 부린 것처럼, 내가 가출을 감행한 것처럼.


 상처 받은 자들을 위로해주는 것은 정말 별것이 아니었다. 그저 컵라면 하나, 상처의 역사를 조용히 들어준 후의 따뜻한 말 한마디이면 되는 것을. 이렇게 간단한 것을.


  말은 사람의 귀를 타고 들어가 다른 귀로 흘러 나가기도 하지만, 몇몇 말들은 새어 나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산다고 했다. 가출의 역사를 겪고 난 이후 난 누군가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는 것을 습관화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조언도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내가 느낀 그대로를 짧은 한마디로 전달해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술 한잔. 간혹 가다 혹자들은 시간이 꽤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말 한마디, 술 한잔이 아직까지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나에게 언급 해주곤 한다.


정말 간단했는데, 뭐 그리 대단했다고.




실제로 받은 질의응답


Q. 너의 현명한 한마디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러 고통들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나에게 인생 편히 살라는 한마디만 해줘라.

A. 안 죽으니 됐다.




4편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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