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 19-11
한 줌 바람이 머물던 자리
“사람에게 연연하지 마라.” 엄마가 말할 때만 해도 절대 그런 일은 없지.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하겠어. 남편에게서 연락이 온 후, 몇 달은 바늘 끝으로
손등을 찍는 표독했던 여자입니다.
덮어둔 3년이란 세월의 마디마디가 한꺼번에 서릿발로 솟아 마음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집 나간 개라면 받아주겠다고 냉랭함을 보인 그녀였어요.
하나뿐인 고명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넋을 잃을 때만 해도, 누가 떼어놓을까
두려워 시간마다 전화하고 다독인 사이였는데, 1년이 조금 지날 즈음, 둘의
사이를 비집고 한 여자가 들어오면서 황당한 간극이 생긴 겁니다.
“이쪽으론 쳐다보지도 마. 다시 말하지만 이혼은 안 돼.” 말없이 듣던 남자는
조용히 아내 곁을 떠났습니다. 결혼 25년 만의 결별인 셈이었어요. 사업장을
아예 여자가 사는 중국으로 옮겼다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딸 잃고 남편 잃고, 기구한 팔자라던 그녀는 시름을 잊고자 한풀이하듯 일에
매달렸어요. 그러면서 그녀의 보험 판매실적은 차곡차곡 쌓였고 2년이 지나자
‘이달의 보험 왕’을 경합하는 자리까지 성장을 합니다.
사람 가슴에 대못 박고 잘 사나 보자... 지치는 순간에 여자는 더 씩씩해집니다.
“너 잘 견디는 걸 보니 기분 좋다”라고 한 친구 말에는 “아픔이 농익으면 사람을
의연하게 만드나 봐.” 웃을 만큼 여유도 생겼어요.
그러던 봄날, 그녀의 버팀목이던 친정엄마 마저 세상을 떴습니다. 만만한 게 엄
마라고 시도 때도 없이 심술부리고 가슴을 긁어도 “오냐. 어미 된 죄다. 실컷
퍼붜라.” 한마디 하고 방으로 들어가던 엄마. 천애의 고아가 벌판에 선
기분입니다.
웬일로? 연락이 없던 큰 시누가 보자고 할 때 스산한 생각이 스치더니, 풍문에
듣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벌 받는 거지. 이제와 무슨 말을 하겠어. 제
잘못인걸.” 공장이 부도나자 여자는 나가버리고 빚잔치하니 알몸이 됐다 하네.
게다가 중병까지 들었다는 말에 여자는 등을 돌립니다. 어쩌겠나. 그 인생
불쌍하잖아. 그래도 조강지처인데. 한 번 용서하면 안 될까? 그때만 해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고 시누 등을 밀어냈지만, 그 뒤로 불면의
밤이 늡니다. 나이 들면 원부터 풀라는 목사님 말씀도 떠오르고.
밉긴 한없어도 사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여자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떨치고 집으로 들어온 그 날부터 여자는 거꾸로 선 시간을
삽니다. 남자가 몇 날을 망설이다가 말해요. “여보,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소?” “오버하지 말아요.”
둘 사이엔 존칭이 오갑니다. 3년을 빼도 25년을 살았는데 부부라는 명제가
힘겹기만 합니다. 그래도 가끔은 시선이 멈춘 곳에 연민의 흔적이라도 남은
걸까. 남자가 다시 말합니다. “한 번만이라도 당신 손잡고 호수공원을 걷고
싶소.” 차마 오래 못 산다는 말은 하질 못하고.
남자는 벌서는 아이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찾는 걸까. 여자는 손가락에 낀 가락지처럼 남편이란 멍에에 눌려온
시간이 버겁기만 한데, 남자는 틈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이리 줘요. 내가 들게요.” “됐어요. 이 정도는 내가 들어요.” “내가 할 테니
당신은 좀 쉬어요.” 빤히 바라보던 여자가 입을 엽니다. “너무 내게 잘하려
하지 말아요.”
남자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한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할 세상과 이별을
연습합니다. 함께 한 일곱 달을 감사하면서. 약봉지와 링거 줄을 달고 매일
마음에 편지를 쓰던 남자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절히 새깁니다.
여자가 미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옥상에 나갔어요. 눈부신 햇살과 스치는
바람결을 느끼면서...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습니다. 여자는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여자는 전화를 받고 병실로 달려갑니다.
눈먼 시선으로 그의 남은 호흡을 어루만집니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삐죽
흘러내리고, 여자도 이슬이 맺혀요. 그래도 내 인생에 찾아온 사람인데.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신음하듯 전합니다. “잘 가세요. 조각난 시간들은
어떻게 맞춰 볼게요.” 그렇게 또 한 사람이 살다 간 자리엔
한 줌 바람만 스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