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18-10]
서양 속담에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역사가 보여준 인과(因果)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지요. 마크 트웨인이
“과거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더라도 분명 그 운율은 반복된다”는
말도 의미심장합니다.
요즘,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픈 역사를 통해 오늘을 유추해 봅니다. 우리나라가 IMF사태
라는 국난의 위기를 맞을 때, 나는 대학 강단에 있었습니다.
대마불사라던 은행과 대기업이 잇달아 도산하고, 파탄난 가정은 늘고,
실직자, 노숙자가 거리에 넘쳐나던 때 신입생들이 들어왔습니다.
신학기 강의실에서 상견례를 나눈 뒤 새내기들에게 물었지요.
“만약 IMF 여파로 아버지가 실직되거나 부도가 나면 어떻게 하겠니?”
떠들썩하던 강의실이 조용해졌습니다. 무작위로 찍은 여덟 명에게
이 질문을 던진 것은 현실을 읽는 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해서였죠.
대답하는 남학생의 굳어진 얼굴과 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삭이는
여학생의 모습을 볼 때는 나도 시선을 내려야 했습니다. 생각보다
학생들의 대답은 대견했습니다.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아버질 도와야죠.” “일단 군대부터 가겠습니다.”
겉으로는 깔깔대며 웃는 철부지 같은데, 속을 들여다보니 나름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도 인상적인 것은 ‘아버지와 여행을 가고 싶다’는 한 남학생의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갖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싶어서”라는 말이 돌아왔지요.
평소 아버지와는 단답식 물음과 답이 대화의 전부였지만, 어려운
상황이 되면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학생들 응답에서
우리 사회의 경직된 ‘부자간 문화’를 봅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아버지와 영화구경을 같이 가본 학생이 단 한 명,
경기장은 2명, 음악회 전시회 등은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지요.
몸은 같이 살고 있으나 보이지 않은 벽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가 겪는 어려움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 매년 봄철이 되면 식량은 떨어지고 햇보리가
나오기까지를 칭하던 보릿고개를 넘을 때도, 초근목피와 나물죽으로
허기를 달래면서도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죽 숟갈을 들려주며 힘내 공부하라 시던 아버지, 전구를 넣어 터진
양말을 깁던 어머니도 그 좁은 공간 속에서 희망을 얘기했지요.
가족끼리 공유하는 희망만은 살아 있었습니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물질적 한파보다 진실로 무서운 것은 정서적 한파입니다. 문 닫는
자영업자, 늘어나는 실직자, 청년 실업자... 불안한 것은 고립되는
가장, 기가 꺾인 가장, 그래서 희망을 놓고 표류하는 가장이 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뼛속 깊이 절여오는 외로움은 절망이란 병을 부릅니다. 아버지가
앓는 병입니다. 여기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손을 잡아주는 가족의
위로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의 낙심과 좌절에 대해 말했습니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대화는 단절되고, 무력감과 소외감은 더 커질 때,
아버지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받겠느냐고.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도시락을 못 싸는 학생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데,
너희들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사람이란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양과목 첫 과제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시했습니다. 취지에 공감해준 학생들이 흔쾌히 따라 주었죠. 편지의
수신은 집이 아닌 아버지의 직장과 일터로, 발신은 학교 주소를 쓰도록
했지요.
예상대로 “아버지 계신 데를 몰라요.” “지방에 계시거든요.” 등의 말이
잇달아 들렸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지요. 이 기회에 아버지가
다니는 직장(일터)이 어딘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알아라.
내가 다니는 학교의 주소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라. 그것이 대학생이
찾아야 할 정체성의 첫걸음이라고 말입니다. 편지는 우표를 붙이되
봉하지 말고 제출하게 했지요.
200여 통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안도한 것은 학생들
대부분이 생각보다 건전하고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차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표현만 없을 뿐, 생각은 멀쩡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딸임이 편지마다
녹아 있었지요. 이 과제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학생들의
호응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 든 아버지들의
반응입니다.
‘기특하다’ ‘잘 커줘 고맙다’ ‘힘이 난다’ 등 편지를 받은 아버지가
답장을 보내오고 틀어졌던 부녀관계가 회복된 학생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너스를 받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오는 여름방학에
부자 여행을 제의 받은 학생도 나왔습니다.
편지 한 장의 위력과 가치를 학생들이 직접 체험한 과제였습니다.
이것이 인문학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