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42]
세상에서 잊혀진다는 것처럼 마음 아프고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인기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건
쓸쓸한 일입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광야에 홀로 버려져 터벅터벅
지평선 위 낙조나 바라보며 걷는 심정이겠죠.
한시(漢詩) ‘영망(詠忘)’은 요즘 읽어도 쉽게 가슴에 와닿는 시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잊어버려/ 천지에 이 한 몸은 고독하다.
세상만이 나를 잊었겠나?/ 형제마저 나를 잊었다/ 오늘은 아내가 나를
잊었으니/ 내일이면 내가 나를 잊을 차례다/ 그 뒤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까운 이도 먼 이도 완전히 없어지리.❞
800년 전, 고려시대 문장가인 이규보가 20대에 ‘잊히는 것’에 대해
썼다고 하니 놀랍기도 합니다. 그의 자유분방하고 풍부한 상상력을
경외 롭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이 나를 잊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잊힌 자의 고독감에 괴로워한 나머지 그가 도달한 것은 아마도 잊혀
진다는 것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망각은 멀든 가깝든 예외 없이
일어납니다. 망각의 극단엔 가장 가깝고 사랑한 나마저 잊으려 하는
내가 있죠.
내가 날 잊는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고독을 벗는
길이기도 하겠습니다. 내게도 분명 아버지 시절이 있었는데, 그새
할아버지 고개를 훠이훠이 오릅니다.
언제 그렇게 내 존재가 망각되었는지, 나는 늘 제자리에 서있었는데
혼자 왔다간 것은 시간뿐인데, 나를 여기까지 굴려놓았습니다. 아내와
사별한 친구들을 보면서 느낍니다.
친구가 아내를 잊었는지, 아내가 친구를 잊었는지 결국 그 끝은
망각임을 알았습니다. 오래전 일본에서 방송돼 큰 반향을 일으킨
‘둘이서 살고 싶었다’는 다큐멘터리가 생각납니다.
77세 할아버지가 치매 걸린 할머니를 데리고 추억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된 사건입니다. 다큐멘터리는 NHK취재팀이 신용카드 기록을
찾아 두 사람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신혼여행지에서 시작된 노부부의 마지막 세상에서의 여행길은
25일 만에 끝이 납니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발견된 남편 외투가
엔딩의 단서가 됩니다.
그가 남긴 외투에는 달랑 동전 몇 닢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노부부는
마지막 여행에서 가진 돈을 탈탈 다 쓴 뒤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일본 열도를 크게 울렸었지요.
이제 고령의 치매가 불러온 비극은 우리 주변에서도 낯설지 않게
잦습니다. 군산에선 80대 할아버지가 치매를 않던 할머니를 10년간
보살피다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어요.
남편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아내의 병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차마 따라가지 못한 채 숨진 아내 곁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충남
예산에서는 치매 간병 할아버지의 또 다른 사연을 전합니다.
91세의 할아버지가 요양보호사 국가자격증 시험에서 최고령으로
합격했다는. 한 날 같이 떠나자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고민하다가
치매를 앓는 아내를 위해 자격증을 따낸 91세 남편입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보다 전문적으로 할머니를 돌볼 수 있게 되었지만,
초고령에 이런 선택을 하는 절박함이 마음 아프게 합니다. 2년 전엔
경기 안산에서 10년간 신부전증을 앓던 아내를 간병하던 70대가
아내의 부탁에 동반 자살한 사건도 있었지요.
부부는 “병마와 싸우는 삶이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로 향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수백 겁의
연을 쌓아야 비로소 맺어진다는 현생에서의 부부.
그 눈물겨운 인연마저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노년의 삶이 위태롭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망각의 길. 그 가는 과정이 더 낯설고 힘듭니다. 잊힌다는
것만큼, 힘들고 모진 말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