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82]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인연을 이야기하며 산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맺어지고 얽혀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니까. 운명이니, 만남이니, 팔자까지 연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이 구절엔 연의 함의가 녹아 있다. 두 남녀도 같은 성당을 다닌다는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이 되고, 절연이 되는 명료하지 않은 인생길을 걸었다.
60대의 남자는 평생 한 우물을 성실하게 파온 자영업자였다. 말수가 적고 자기 업에만 성실하게 일하는 성품 탓에, 수십 년을 이웃으로 살아도 남의 입에 오르지 않은 조용한 남자였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암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에 주위를 놀라게 했다. 술, 담배도 않고 화를 내는 스타일도 아닌데… 많은 동정을 샀다. 아직 이생의 연이 남았는지 남자가 회복했다는 소식이 돌았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이번엔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가더니 마취에서 깨나지 못하고 운명했다는 부음이 들렸다. 주변 사람들은 “남편 살리는데 진액을 쏟다 명을 단축했다”라며 안쓰러워했다. 홀아비가 된 남자는 여전히 차분한 삶을 살았다. 늘 깨끗한 옷차림으로 몸을 단정히 하고 미사에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내가 떠난 지 6개월쯤 됐을까 폴폴 재혼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새 장가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이 아깝다고 한 것은 새로 맞은 여자를 두고 한 말이었다. 마음씨 곱고 성정이 따뜻해 딸이 결혼하자 주위에서 여러 차례 재혼을 권했었다. 그때마다 “무슨 영화 누리려고 결혼을 두 번씩 해요?” 냉정함을 보여온 여자였다. 그녀는 50대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남편이 낸 사고이니 보상 한 푼 없이 여자 혼자 광야에 나 앉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을 다니며 생활을 꾸려나간지 10여 년…. 나이가 드니 힘도 달리고 적당한 일거리 찾기도 쉽지 않았다. 자식이라고는 결혼한 딸 하나뿐인데 저 살기도 빠듯하니 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수절하던 여자가 결국에는 몸하나 의지하고 살 데라면 좋겠다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러던 차에 덜컥 그 남자에게 잡힌 것이다. 중매쟁이가 오가면서 기름을 바른 탓이지만.
“큰돈은 없지만, 집은 있으니 그러다 남자 가면 집 하나는 생기잖아.”
품행을 봐도 남자 하나는 진국이라는 말에 여자 마음이 흔들렸다. 소문 없이 조용하게 예식을 올리고 새 살림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챘다.
“그래 잘 됐다. 서로 의지하고 살면 좋지 뭐.”
여자의 밝은 표정을 보고 여기저기서 반갑게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외로운 사람끼리 만났으니 잘 살아야지 모두들 기원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두 사람 이야기가 사람들 관심 밖으로 흘러갔을 즈음,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이혼했다는 소리가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웬만하면 참고 살 여잔데 무슨 소리냐고 했지만 내막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막상 결혼해 집에 들어가니 듣던 것과 너무 다른 현실을 본 거였다. 큰돈은 없다 쳐도 집을 모기지론 해 살 줄은 몰랐었다.
남자가 그 돈에서 얼마를 떼주고 살림을 하라는데 어떻게 쓰나 눈치를 주었다. 엄마가 딸 집에 가는 건 당연한 일임에도 눈총을 주니 이래저래 한숨이 나왔다.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남자임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연이 없는 결혼을 결심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마음이 떠나니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결국 이혼이란 말을 꺼냈다. 여자는 펄쩍 뛰는 남자에게 차근차근 말했다.
“4년을 버텨왔지만 우리 연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여자가 차분히 정리해주니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내게 5천만 원만 주세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남자도 끝내는 포기 했는지 2천만 원은 주겠다고 물러섰고 여자는 3천을 고수했다. 끝내 두 사람은 원치 않은 법의 판결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가정법원 판결이 여자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이혼을 하되, 남자에게 재산 배분 의무는 없다’라는 거였다. 여자가 재산 형성에 기여한 바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 후 증식된 재산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므로 배분 의무가 없다는 것. 2만 원이라도 준다고 할 때 받을 것을, 하지만 감정이 상한 남자는 그 마저도 못 준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연을 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알아보지도 않고 시집갈 생각을 했을까? 이혼도 그래, 좀 알아보고나 하지. 사람들이 연민 깊은 시선을 보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은 것으로 끝이 났다. 새로운 연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한 여자의 비원은 필연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불 탄 삼처럼 끊어졌다. 한 올의 연에 기댔던 인생사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줄이야.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