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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빨래터

by 이관순


요즘 자연의 부름은 빛깔들이다. 붉은 봄꽃이 이울면서 먼저 부름 받아온 연둣빛 뒤로 초록빛 무리가 벌써부터 녹색 물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몽골의 친구가 보내온 사진 속에도 봄의 신록이 눈 부시게 아름답다.


봄이 오면 어머니는 미뤄둔 겨울빨래를 하려고 개울로 나가셨다. 그 뒤를 빨래 짐을 진 아들이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집에 가서 쉬라고 하지만, 아들은 빨래가 끝나도록 어머니가 심심하지 않게 곁에서 말동무를 해드렸다. 지루하지 않게 이런저런 말보를 풀다 보면 어머니도 좀처럼 말하지 않던 심중의 얘기를 꺼내실 때가 있다. 우리 모자는 많은 얘기를 빨래터에서 나눴다. 딸 없이 아들만 셋 둔 어머니가 안쓰러워 주말이나 방학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내려와 어머니와 지냈다. 게다가 어머니는 우리 형제의 어머니만도 아닌 것이, 당신이 개척한 교회와 교인들을 돌봐야 했으므로 소소한 집안일은 누군가가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 셋 공부시키고 교회를 건사하느라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지만, 항상 밝은 표정으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으셨다. 어머니의 한숨을 받아주던 그 빨래터. 막내아들과 빨래터에 나가면 빨래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고 반기셨던 어머니. 이불 같은 큰 빨래는 아들이 비누칠하고, 치대고, 헹구어 짜고, 널고…. 때로는 어머니와 마주 앉아 풀 먹인 이불 홑청을 맞잡아 당긴 후 다듬질해 마지막 씻는 일까지 함께 했다.


빨래가 마르면 게는 것도 아들 몫이었다. 다림질은 중학교 때부터 익혔다. 교복은 물론 출장 가실 때 입으실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바지를 다리고, 구두를 꺼내 닦는 일까지 내가 도맡아 했다. 구두약을 솔에 찍어 고루 바른 후 천 조각을 손가락에 감고 구두코에 침을 탁탁 뱉어 회전하듯 닦으면 어느새 반짝반짝 윤이 났다. 내가 다린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으시면서 “수고했다.”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에 입을 째지게 벌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원래 종교가 없던 어머니는 30대 한창일 때에 중병에 걸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대장암이 아니었나 싶다.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에 몇 달간을 입원했으나 ‘이젠 더 이상 해드릴 게 없다’는 일종의 사망 선고를 듣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영동 심천의 사택으로 데려왔다. 당시 아버지는 한국전력(현) 지방 사업소의 책임자이셨을 때였다. 39세의 꽃다운 나이에 올망졸망 어린 삼 형제가 눈에 밟혀 세상을 어이 떠나실까. 우울한 하루하루가 지날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붙잡은 곳이 교회(구세군교회)였다.


가누기도 힘든 몸으로 사람을 불러서 지게에 이불을 깔고 걸터앉아 교회에 나갈 만큼 신앙에 심취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끝내 눈을 감으셨다. 방안 가득 슬픔과 울음이 차오를 때, 아버지는 한쪽에서 부음 전보를 띄우려고 주소를 정리하고 계셨다. 그러길 1시간여. 어머니의 병석을 지켜온 이모가 놀란 소리로 ‘형님!’을 불렀고, 검게 죽은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꼬대처럼 ‘하나님이 나를 30년 간 쓰신다’고 했다는데, 놀란 가족들은 그 소리를 못 듣고 깨난 어머니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렇게 회생한 어머니는 신기할 만큼 빠른 회복을 보이셨다. 미음에서 죽으로, 죽에서 다시 밥과 염소를 곤 보양식으로 음식 메뉴를 바꾸더니, 두 달도 채 안 되어 교회에 나갈 정도로 몸의 회복이 빠르셨다. 믿기지 않은 기적 같은 일을 우리 가족은 경험하고 있었다. 신심(信心)으로 뜨거워진 어머니는 죽음에서 깨남과 함께 영과 육이 모두 바뀐 새사람이 돼 있었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되찾은 기쁨에 구름 위를 걷듯 붕 떠서 다녔다. 그러던 이듬해 겨울, 아버지가 새 임지로 발령을 받아 우리 가족은 충남 금산으로 이사를 갔다.


신앙심에 불타던 어머니는 교회를 떠나는 것을 크게 아쉬워하셨다. 더더욱 어머니를 실망시킨 것은 아버지가 부임한 임지에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주일은 다가오는데 교회는 없고, 고심하던 어머니가 아들 셋을 앞에 앉히고는 예배를 결행하셨다. 교회를 다니신 지 1년 남짓한 때에…. 뜨거운 신앙심 외에는 예배를 인도할 만한 경험도 없고 성경 지식도 부족했을 텐데, 두려움 없이 예배를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으로 시작된 예배는 하나 둘 동참하는 마을 사람들이 생기면서 금세 안방이 협소해졌다. 그러자 안방에서 대청마루로 나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것도 1년이 못 넘기고 비좁게 되었다. 사정을 알게 된 서울 구세군 본부에서 24인용 군용 텐트를 보내왔다. 손재주가 좋으신 아버지가 동산 밑에 텐트를 치고 그곳에 새 예배처를 만들었다. 이때도 예배 인도는 어머니 몫이었고, 우리 형제는 교회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맡았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교회에 나간 지 1년 남짓한 분이 어떻게 성경 말씀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했는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교인이 늘자 구세군 본부에서 사관(목사)을 파송했다. 하지만 그 뒷바라지는 여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아버지 봉급으로는 아들 셋 공부에 올인해도 벅찰 텐데 교회 살림까지 도맡고 있으니, 그 어려움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힘든 내색 없이 늘 웃으며 살림을 하셨고 사명처럼 교회 일을 보았다.


교회는 다시 천막을 걷고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밤이면 농사일을 마친 교인들이 달빛 아래 흙벽돌을 찍고, 개울에서 자갈과 모래를 퍼 날았다. 모두들 즐겁게 동참해 주었다. 돈이 없는 처녀들은 자신의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잘라 내놓았다. 머리를 자르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구세군 신문에 소개되고, 이에 감동된 해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물자를 보내주었다. 마침내 교인들이 만든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엔 검은 루핑을 올린 작지만 멋진 교회가 완공되었다. 아버지가 종틀을 세우고 산소통을 매달아 종을 치면 종소리가 얼마나 장중하고 은은한지 20리(里) 밖 교인들까지 잠을 깨워 교회로 부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게 몇 달이 안 지났을 때, 어머니에게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전 세계 구세군교회의 리더인 영국의 만국 대장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개척지 교회로 우리 교회를 방문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6.25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되었던 때의 일이었다. 빈궁한 시골에 말로만 듣던 키가 장대 같고 코가 큰 서양사람, 구세군 대장이 찾아와 하룻밤을 보낸다 하니,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부러워한 교회도 많지만, 이를 맞이할 어머니 마음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음식, 잠자리, 심지어 화장실 문제까지 ‘오 마이 갓!’ 비명을 지를 만한 일이다. 여기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금식하면서 밤낮없이 하나님께 ‘도와주소서’ 기도에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방문을 한 주 앞둔 날, 어머니와 빨래터에서 마주 앉았다. “엄마 괜찮으세요?” 아들이 걱정하자 “왜 걱정되냐? 일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해주실 게다.” 그때 어머니의 담대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는 온 정성으로 어려운 손님을 맞았다. 이튿날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서양 사람을 구경하려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신작로를 둘러쌌다. 그분이 떠나면서 “원더풀, 베리 해피!” 어머니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할 때, 나는 수줍게 웃는 어머니를 천사처럼 바라봤다.


올봄, 부모님 산소 가는 길에 그 빨래터를 찾았다. 긴 시간이 지난 곳에 흔적이 남을 리 없지만, 마른 건천이 된 빨래터에 한참을 앉아 어머니의 그리움을 더듬었다. 내가 어머니만큼 세상을 살았던 그해, 어머니 기일에 맞추어 가족들이 모였다. 이날 추도예배에는 몸이 불편하신 이모님이 멀리서 와주셨다. 예배를 마치자 이모님이 둘러앉은 우리 형제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서 운을 떼셨다.

“어머니가 죽었다 깨나면서 하신 말을 누가 기억하고 있냐?”

우리 형제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말하는 사람이 없자 이모님이 말씀하셨다.

“나만 그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지. 어쩜 한 해도 더하거나 빠지지 않은 30년이더구나. 깨나면서 하신 말씀대로 정확히 30년을 사셨더구나. 하나님의 이적을 전하려고 일부러 왔다….”(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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