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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대하여

by 이관순

왜 사람에게는 시든다는 말 대신 늙는다는 말을 쓸까. 나무도 꽃들도 다 시들어버린다면서 사람은 왜 세상을 뜬다고 할까. 무심코 흘려보냈던 말들이 잔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나이가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 언젠가부터 보고 느끼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갑자기 눈귀가 밝아질 리 없을 텐데, 살아온 날들로 많은 생각이 기울면서 젖는 현상일 것이다.


너무 인생을 무심히 살아왔다는, 그래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회한이나 후회일 수도 있겠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는 걸 자랑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런 것을 앞세워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생이란 산허리를 내려오다가 문득 무심히 지나친 많은 일들이 잠들지 못하고 부스스 눈을 뜬다.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나를 부르고 찾기도 했을 텐데. 그때 나는 보지 못했고 응대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이 듦이 현실이 된 나를 불러 세운다. 석양의 그림자 같은 덧없는 인생을 살면서 부질없는 욕심과 허상을 잡으려고 때 묻히고 얼룩진 나를 말이다. 시듦으로는 그것을 모를 것이다. 오직 나이 듦으로 아는 진리이다. 이는 늙는다는 말의 또 다른 음유였다. 시들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나이가 들면 젊은 날과 달리 주고받는 것이 다르고, 떠남과 만남이 생기는 유별함이 있다.


이생이 허망하면 내생에 기대하려 들고, 병들어 건강을 다치면 무심했던 내 몸의 중함을 깨치는 이치와 같다. 청력을 잃으면 시력이 강해지듯 미움을 버리면 커지는 것도 있다.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감사할 줄 모르면, 마음은 비감해지고 미움과 원망이 비집고 들어오는 법이다. 과욕이 부른 소유에는 머리에 망념이 가득해 지기 십상이다. 아직도 채울 것이 남은 사람은 부족함에 갈증이 남아도, 이만하면 됐다는 사람은 마음에 족함을 갖게 된다.


옛 문장에 같은 것을 갖고도 ‘팔여(八餘․8개가 남음)’라고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고, 또 누구는 ‘팔 부족(八不足)’이라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이생의 삶인 듯하다. 늙음에서 잃은 것과 얻는 것의 차이는 뭘까? 잃어서 득이 된다면 잃을수록 좋겠으나, 얻어 해가 되는 것은 적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잃은 것이 많든 적든, 얻은 게 크든 작든, 그 기준은 누가 정할까.


자신만이 자기의 기준을 정할 수 있다. 나이 듦이 시듦보다 차원이 다른 것은 긴 세월을 살며 경험하고 축적한 내 인생의 스펙이 내 기준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눈부시게 푸르던 세월이 사위어 가고 있다. 생명의 경이에 눈 떴던 봄이 이울어 갔고, 노동의 기쁨을 주던 여름이 떠난 자리로 목마른 가을이 단풍으로 불타고, 이젠 낙엽 귀근(落葉歸根), 남은 길을 가늠해야 할 시간에 서 있다. 굽은 등 너머 노을 진 서녘에서 부엉이가 울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이 듦이란, 떠난 것에 미련두지 말고 잃은 것에 연민하지 말고, 마음에 찌든 미움을 태우고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화해할 때를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다 그렇지.” “별난 인생 있나?” 고까웠던 일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곰삭힌 감정은 다 흐르는 세월에 씻어내고 텅 빈 마음으로 내 삶을 되돌아보며 그곳에 명상의 시간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이 듦이란, 미천한 인생의 한계를 알고 참회와 감사로 채우는 시간이다. 잊고 살았던 것들에 눈 뜨고, 그들을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시간을 갖는 일이다. 살아온 것에 감사하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할 시간이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이만하면 잘 살았다 감사하다.” 마음에 평강이 깃든다. 무한한 성찰과 감사 뒤로 하늘의 자비와 은총을 기다릴 때이다. 태양빛으로 짱짱한 한낮도 빛나는 시간이지만, 낙조가 들 때의 고혹함도 매력적이다. 생의 어느 한 곳 의미가 없는 과정이 있을까.


해가 많이 기울었다. 촘촘하던 시간도 그만큼 헐거워졌다. 동네 골목에 드리운 그림자도 한층 깊고 서늘해졌다. 누가 노래했던가 나이 듦은 늙어감이 아니라 옻칠을 더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위로하면서 격려하면서 남은 세월을 배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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