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기] 화성과 남양주에서 만난 정조와 정약용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군왕은 세종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군왕은 '정조'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용상에 올랐으나, 민생과 국방을 안정시키고 문화를 중흥시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왕의 덕을 칭송하며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아름다운 기풍이 조성됐다.
정조라고 하면 무엇보다 '수원 화성'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정조의 꿈이 응결된 장소다. 본인은 정기적으로 화성을 방문해서, 성과 그 주변부의 아름다움 및 정조의 숨결을 느낀다. 비록 전쟁 때 크게 훼손된 적이 있지만, 설계도가 남아있어 과거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복구해 놓은 상태다. 탐방하기 전에 화성이 어떻게 건설됐는지, 그리고 화성에 녹아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위에 오른 후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 작업을 본격화했다. 그는 1789년 7월 서울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수원 남쪽 화산으로 이장한 뒤 '현륭원'이라고 명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조의 정적인) 노론 벽파와 여타 신료들은 그저 정조의 효심이 작용한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이를 통한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바로 화성 건설이다. 정조는 화성을 개혁 정치의 본산으로 삼고, 기존 '판'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모색했다. 일종의 승부수였다. 화성 건설에는 정조의 심복들이 총출동했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총책임을 맡았다. 이때 노론 벽파는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정조는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며 화성 건설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다. 궁극적으로 정조는 화성을 국가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 생각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은 약 10년으로 전망됐던 공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2년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후 정조는 화성에 '십자로'를 만들고 도로 양편에 큰 상가를 조성했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화성 인구의 증가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는데, 채제공은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다"라고 답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조는 국가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려 했다. 그리고 화성 주변에서 자주 범람하던 진목천을 막아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만들었다. 만석거는 쌀 만석을 생산해 백성들을 풍요롭게 먹고살게 하겠다는 의미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만'(萬) 자를 사용해 자주 국가를 천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화성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대유둔'(또는 대유평)이라는 큰 국영농장도 조성했다. 대유둔 농토의 일부는 화성 주둔 군사들에게, 또 다른 일부는 농토가 없는 수원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모든 농사 자재는 둔소(화성 관리사무소)에서 제공했으며, 대유둔에서 얻은 수확의 60%는 개인이 나머지 40%는 화성유수부에 세금으로 내게 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른 효과는 절묘하게 나타났다. 활발한 농경 활동으로 생산량이 늘어 국가 재정에 보탬이 됐다. 여기서 나온 세금으로 화성 주둔 군사들의 월급을 제공하면서 백성들은 고통스러웠던 군포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조는 대유둔의 사례를 전국 8도에 전파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십자로를 통해서는 '상업혁명'의 모범을, 대유둔을 통해서는 '농업혁명'의 모범을 선보였던 셈이다.
화성에는 '장용영'이라는 군영도 설치됐다. 앞선 1785년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장용위라는 군왕 호위 전담부대를 창설했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뒀다. 8년 후 정조는 장용위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만드니 이것이 바로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구분됐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설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던 만큼, 편제도 중앙집권적인 오위 체제를 도입했다. 장용영은 사실상 노론 벽파의 군권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당초 노론 벽파의 군사적 기반인 수어청과 총융청 등에 밀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를 압도해 나갔다. (규장각이 정조를 위한 개혁적 문신을 양성하는 곳이었다면, 장용영은 정조를 위한 개혁적 무신을 양성하는 곳이기도 했다.) 전세 역전을 직감한 정조는 장용영의 군사들을 동원해 노론 벽파가 보란 듯이 '무력시위'를 벌였다. 어느 날 정조는 '화성 능행'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때 수많은 장용영의 군사들이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를 겹겹이 에워싸 호위했다. 노론 벽파 신료들은 이 장면을 매우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반면 백성들은 왕의 능행을 즐겁게 뒤따르거나 꽹과리 등을 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언격쟁'을 행했다. 정조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줬다. 평소 그는 "소설을 읽는 것보다 백성들의 민원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소통에 능했다. 정조는 재위 기간 중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방문했다. 결국 이러한 능행은 단순 참배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 의지를 표방하는 정치적 성격이 짙은 이벤트였다.
화성 건설을 기점으로 정조와 노론 벽파의 희비는 엇갈렸다. 정조는 개혁 정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심지어 그는 노론 벽파 신료들 앞에서 왕의 학문적 우월성과 의리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내세우기도 했다. 노론 벽파는 위축됐으며, 정조의 친위 쿠데타와 천도 가능성 등에 대해 실제적인 위협을 느꼈다. 다만 이러한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석연치 않게 급서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암살설이 강하게 제기될 만큼, 정조 급서는 충격적이었다. (정조 암살설은 저서인 <암살의 역사>, <정변의 역사>에서 자세히 다뤘다.) 정조실록에는 정조의 죽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날 유시(酉時)에 상(정조)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정조는 비록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화성은 지금도 남아 후대인들에게 유익한 역사적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이 '천재 군주'의 훌륭한 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나 다름없다.
정조는 화성 그 자체였다. 화성 여기저기에서 정조를 정면으로 내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게의 일반상품에서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특히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본 (건물 벽면에 그려진) 정조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그림은 정조의 무인적인 기질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화성의 상징은 팔달문이다. 화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이곳이 떠오른다. 화성에 있는 건물들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조선 후기의 발달된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팔달문이라는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왔다.
각 성문 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 게 화성 관람의 묘미 중 하나다. 걸으면서 성의 안과 밖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다. 성을 상징하는 깃발 옆에 있을 때에는 마치 성을 지키는 장수가 된 느낌이다.
행궁이란 왕이 행차해서 머무르는 궁궐을 말한다. 방문했던 날에는 행궁 내에서 과거시험 재연 행사가 열렸다. 선비 복장을 한 사람들이 왕과 관람객들 앞에서 가상으로 과거시험을 봤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은 왕이 직접 감독하고 문제까지 출제했다. 그동안 드라마에서나 봤던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정말 이렇게 시험을 봤겠구나' 싶었다. 행사 도중에 특별한 장면도 연출됐다. 한 선비가 부정행위, 일종의 커닝을 하려다가 군졸에게 걸린 것이다. 선비와 군졸은 익살맞은 동작과 표정으로 많은 관람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화령전에 가면 정조의 어진을 볼 수 있다. 정조는 평소에 어진을 자주 그렸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와 단원 김홍도가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하지만 과거의 어진은 남아있지 않다. 용두동 대화재 때 모두 타버렸다. 현재 볼 수 있는 어진은 선원보감의 간략한 초상화로 추정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조선 군왕들의 어진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행궁 바깥으로 나가면 화성의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생각보다 높았다. 천천히 올라가면서 정조와 화성의 역사를 돌아보거나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수원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고스럽더라도 화성에 가면 이 길을 꼭 걸어보시길 바란다.
관람을 갔던 당시에는 화성 문화재가 한창이었다. 인상 깊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전통 무용은 물론이고 중국 무용사들의 공연도 볼 수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유적지에서 중국의 전통 무용이라. 적잖게 낯설었지만, 그 나름의 의미도 있었다. 중국 무용 특유의 신비로움이 기가 막히게 표현돼 많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신료로는 다산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다방면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천재 실학자였다. 상술했듯 화성 건설에도 깊숙이 관여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다. 기기도설을 참고해 복합 도르래인 '거중기'를 고안해 냈고, 이를 활용해서 무거운 석재들을 효율적으로 운반했다. 당시 정약용은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활차(滑車)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두 가지 편리한 점이 있으니, 첫째는 사람의 힘을 줄이는 것이고, 둘째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화성의 공사 기간은 눈에 띄게 단축될 수 있었다.
정조는 정약용을 매우 신임했다. 노론 벽파들의 집요한 견제와 천주교 관련한 불미스러운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신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공적인 자리는 물론 술자리 등 사적인 자리에도 정약용을 불러 함께했다. 급기야 정조는 노론 정승들을 몰아내고 정약용을 재상에까지 앉히려 했다. 머지않아 환상적인 조합이 현실화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 됐다. 정조가 없는 세월은 정약용에겐 그야말로 고난의 세월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으로써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이후에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 됐다.
외가가 있는 강진에서 정약용은 18년 간 학문에 몰두했다. 그 결과 대단한 저서들이 나올 수 있었다.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목민심서>,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흠흠신서> 등이다. 특히 <목민심서>는 지금도 공직자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정약용은 1818년 8월에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도 학문과 저술 활동에 힘쓰다가 1836년 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정조의 증손자였던 헌종은 정약용의 죽음 소식을 듣고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남양주에서는 정약용의 마지막 발자취를 만나볼 수 있다. 본인은 수원 화성처럼 이곳도 자주 방문해 지역의 아름다움과 정약용의 숨결을 느끼곤 한다. 가을이 절정이었을 때 갔던 다산생태공원은, 본인의 마음에 평온함을 선사해 줬다.
생태공원을 지나면 정약용 선생의 묘가 있는 장소에 도달한다. 이곳은 지난 1972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선정됐다. 단순히 정약용의 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유당과 기념관 등 부수적인 것들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규모로 조성돼 있어서 놀라웠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먼저 드넓은 정원과 정약용의 동상 및 명언이 새겨진 비석을 볼 수 있다.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손안에 둔 듯 가볍게 여겨야 옳다." 마음에 크게 와닿는 말이었다.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기거했던 여유당도 뜻깊게 다가왔다. 여유당이란 명칭은 '매사에 신중하고 경계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학문에 힘쓰고 저술에 매달렸다. 여유당 건물 곳곳에는 아름다운 시들이 전시돼 있었고, 정약용이 직접 심은 나무도 존재했다. 특별한 날에는 여유당에서 차를 마시는 다도 체험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안내가 되어 있는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정약용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돼 있었다. 묘제는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정비했으며, 봉분 정면 오른쪽의 모표는 1959년에 신규 제작했다. 봉분 앞에 있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배설석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말로만 들었던 조선 최고 실학자의 무덤을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애민 정신을 되새기며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뼈아픈 역사와는 상반된 역사가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일렁이고 있던 '근대화'라는 거대한 물결에 발맞춰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 수도 있다. 천재 군주(정조)와 천재 재상들(정약용, 이가환 등)이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면서 말이다. 그랬다면 조선은 다시 한번 크게 웅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급서라는 뜻밖의 불행으로 이 모든 가능성은 일순간 사그라졌다. 정조 사후 조선은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휘어잡았다. 정조의 모든 개혁 정책들은 폐기됐고, 정약용 등 정조의 최측근들은 쫓겨났다. 이후 극소수의 권세가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는 '세도정치'가 행해지기도 했다. 정조를 빼닮은 손자인 효명세자가 등장해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대체로 왕권은 약화돼 중심을 잡지 못했고, 사회 도처에선 각종 폐단들이 횡행했다. 역사적 흐름에 어긋나는 퇴행과 반동은 조선을 끝내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조선 후기의 통사(痛史)를 목도할 때마다 정조와 정약용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럴 때마다 이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화성과 남양주로 나아가 마음을 달랜다. 그러면서 현시대의 위정자들이 정조와 정약용을 본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 앞서 살다 간 두 위인은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