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사상 최강의 군대
최근 유럽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 열강들이 이른바 '루소포비아'(Russophobia)를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루소포비아는 러시아의 관형사형 'Russo'에 공포·혐오를 뜻하는 'phobia'를 이어붙인 합성어다. 이 용어는 18~19세기 러시아 제국에 대한 공포감과 20세기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러시아, 러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의미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유럽 인근에서 대규모 군사훈련까지 실시하면서 '루소포비아'는 극에 달하는 형국이다.
유럽 국가들 중에 독일의 재무장 선언이 주목된다. 독일 정부는 2035년까지 현역 병력을 25만 5000∼27만 명, 예비군을 20만 명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병력뿐만 아니라 각종 무기도 대량으로 생산할 태세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향후 몇 년 안에 독일군을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재래식 군대로 만들고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인은 독일의 군사적 움직임에 위압감을 느꼈다. 이는 다른 어떠한 국가들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독일의 화려했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서인 <전쟁의 역사>를 쓰면서도 독일군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독일군은 가히 '사상 최강의 군대'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전쟁 초반,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을 단독으로 제압했고 유럽 대륙을 석권했다. 소련과의 대결에서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만약 히틀러의 오판이나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독일이 소련에게 최종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 당시 독일군의 재래식 전력 규모가 타 국가에 비해 월등했다고 말이다. 틀렸다. 독일군의 재래식 전력 규모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나 소련군보다 뒤떨어졌다. 엄밀히 말해 2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독일군은 규모의 열세를 다른 것으로 보완함으로써 최강이 될 수 있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지휘 체계
독일군의 지휘 체계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임무형 지휘'라는 매우 선진적인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하급지휘관의 자율성과 분권화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독일군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 속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지휘 체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게 프랑스군이다. 이들은 '정형화 전투'를 지향했다. 모든 부대와 무기를 세심하게 정렬하고 전장을 질서 있게 통제하려 했다. 군에서의 중앙집권화와 상명하복이 엄격히 고수됐다. 고위지휘관들의 의견만이 중시됐으며 하급지휘관들의 의견은 묵살되기 일쑤였다. 고위지휘관들이 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후방 지휘소에 머물렀음에도 이 교리는 깨지지 않았다.
독일군의 임무형 지휘 체계가 빛을 발했던 사례로, 2차 대전 초기 프랑스와의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독일군은 만슈타인이 고안해 낸 '낫질 작전'을 채택해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는 독일군 조공이 벨기에 북부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주력을 유인하는 사이, 독일군 주공이 방어가 허술한 중앙부인 아르덴과 뫼즈 강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프랑스 북부 지역(대서양)으로 빠르게 진격한 뒤 영국-프랑스군 주력에 대한 포위 섬멸을 달성하는 작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들이 있었지만, 독일군의 현장 지휘관들은 그때그때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난관들을 극복해 나갔다. 때로는 상부의 명령과 정반대 되는 행동까지 하면서 '단 6주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키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전술
독일군의 핵심 전술은 '전격전'이다. 독일어로는 'Blitzkrieg'(블리츠크리그)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전차, 기계화 보병, 항공기, 공수부대가 총체적으로 동원된다. 먼저 급강하 폭격기나 일반 폭격기로 적군의 주요 거점을 폭격하며 통신망 및 보급로를 차단한다. 공수부대를 전선 후방에 신속 투입해 주요 통로를 확보한다. 전차가 집중된 기갑사단으로 적군 방어선을 돌파한 뒤 공수부대와 연계한다. 선두 기갑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일반 보병사단이 후방에 남겨진 적군의 잔여 병력을 소탕하고 도시를 점령한다.
독일군의 전격전이 빛을 발했던 사례는 2차 대전의 '독소 전쟁'이다. 독일군은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으로 나뉘어 전격전을 전개했다. 이들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소련의 대군은 순식간에 궤멸됐고 광활한 영토는 빠르게 잠식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가 독일군에게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은 "소련이 무너지는 데에는 며칠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히틀러의 오판과 계절적 요인, 미국의 지원 등이 소련을 기사회생시켰지만, 철저히 전술적 측면을 감안하면 독일군은 사실상 무적의 군대였다.
■에이스들
독일군에는 당대 최고의 명장들, 이른바 '에이스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에르빈 롬멜, 발터 모델 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의 명장이라고 하면 주로 맥아더를 생각하지만, 맥아더도 이들에 비하면 B급 장수에 불과했다. 상술했듯 만슈타인은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킨 '낫질 작전'의 설계자였다. 이후 소련군과의 크림반도 전투에서도 탁월한 지휘로 승리를 이끌었다. 구데리안은 전격전의 설계자이자 독일군의 기동전을 완성한 장군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전차는 총보다 빠르게 생각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아무도 전차의 잠재력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구데리안은 이를 알아보고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설을 남겼다. 롬멜은 우리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프랑스 전역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능수능란한 지휘를 펼치면서, 적군에게 '예측을 깨는 사막의 여우'로 불렸다. 특히 토브룩 공방전이나 엘 아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이 선보였던 작전은 군사작전의 정석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오늘날 군사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발터 모델은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앞서 서술한 장군들이 최고의 공격수였다면, 발터 모델은 최고의 수비수였다. '총통의 소방수'로 불리며 히틀러의 가장 큰 신임을 받기도 했다. 미영 연합군이 야심차게 실시한 마켓가든 작전을 실패하게 만들었고, 압도적으로 많은 소련군의 진격도 상당히 지체하게 했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독일은 패망의 시간을 한참 뒤에 맞이할 수 있었다.
■무기
독일군의 무기량은 적군보다 많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고 훌륭한 무기들을 대거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전폭 13.82m, 최대속도 310km/h, 항속거리 1000km 등 혁신적인 성능을 갖췄다. 급격히 하강하며 폭탄을 투하했고, 이 과정에서 특유의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적군에게 극심한 공포와 혼란을 줬다. 중전차인 '티거 전차'는 '전장의 사신'으로 불릴 정도로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8.8cm KwK 43 대포(약 88mm)를 장착해 강력한 파괴력을 선보였고, 80~100mm의 두꺼운 장갑으로 높은 방어력까지 자랑했다. '히틀러의 전기톱'으로 불린 'MG 42' 기관총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분당 1200발을 난사할 수 있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초반부에 나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 병사들을 잔혹하게 살육해 나가는 기관총이 바로 MG 42였다. 독일군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도 했다. 'v1', 'v2'가 그것이다. v2의 경우 최대 사거리 200km 이상, 고도 90km, 속도 마하 5에 달해 당시로선 요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끝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대포인 '구스타프 열차포'는 구경 800mm 포탄을 최대 47km까지 발사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재래식 화기임에도 불구하고 버섯구름까지 만들어낼 정도였다.
전례 없이 뛰어났던 독일군이었지만, 전쟁에서 이들은 패배했다. 이의 원인이 다양하게 분석되는 가운데 본인은 최고 사령관인 히틀러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결코 군사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군사 천재로 생각했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이 대사를 그르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갑자기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림으로써,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덩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철수하는 시간을 벌어줬다. 독소 전쟁에서는 모스크바 점령을 미루고 남부 지역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소련군에게 대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독일군은 히틀러가 있었기에 승승장구한 게 아니라 '히틀러가 있었음에도'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유능한 장군들과 뛰어난 전술 및 무기 덕분이었다. 정치는 정치인이, 전쟁은 군인이 해야 한다는 명제는 언제나 진리에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독일군은 분명 악역이었지만, 이들의 군사적 역량은 지금도 심도 있게 연구되는 롤모델이다. 이러한 측면을 감안할 때, 독일군의 전쟁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