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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Aug 01. 2024

숏의 지속을 목격한다는 것

샘 멘데스의 <1917>

<1917>에 관한 상찬은 대개 영화의 기술적 시도에 한정된다. <1917>은 촬영본을 이어 붙여 관객이 단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을 통해 영화 전체가 하나의 숏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기술적 시도에 관한 언급이나 나열에 그칠 뿐, 그것이 왜 성과인지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 미심쩍은 건 기술에 관한 언급 뒤에 따라붙는 체험의 영화라는 수식이다. 영화는 과연 21세기적 엔터테인먼트 체험으로 관객을 유도하는가. 도리어 시각에 매몰된 고전적 관람 경험으로 관객을 이끄는 쪽에 가깝지 않은가. 영화의 연속성은 어딘가 관객의 투지를 자극하는 데가 있다. 잠시 어떤 관객의 사례를 가정해 보자. 그는 숏이 정말로 끊어지지 않는지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러던 중 카메라가 인물과 위치를 바꾸는 결정적 전환의 순간을 놓치고 만다. 이후 그는 영화를 어떻게 촬영했을까를 상상하며 영화를 본다. 그러나 카메라 뒤 인간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하나의 숏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해도, 개별 주체의 인식 체계 내 단절마저 통제되지는 않는다. 영화의 기술적 허점을 찾던 관객은 이제 기계의 눈을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의 오류를 확인하게 된다. 화면은 무한히 연속될 수 있어도 인간의 눈은 연속적이지 않다. 설사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눈을 감지 못하도록 고정하는 장치가 있다고 해도 영화를 보는 도중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잔상의 무의식적 개입을 제어할 수 없다. 디지털 영상 이미지가 파편화된 만큼이나 인간의 시지각은 이미 파편화되어 있다.


샘 멘데스가 촬영 기법을 동원해 <1917>에서 시도한 것은 지가 베르토프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에서 카메라와 인간의 눈을 대비시키며 보여주려 한 것과 견줄만하다. 베르토프는 인간의 시각을 뛰어넘는 카메라의 기계적 시각을 예찬했다. 다만 베르토프의 시대에는 짧은 숏의 연속으로서 몽타주 이미지가 인간의 단일한 시선에 대비되는 것이라고 인식되었다면, 샘 멘데스는 컷이 없는 숏의 지속으로 인간의 파편화된 시선에 대항한다. <1917>은 관객이 컷에 의한 영화의 분절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비가시적 연속 편집을 시공간의 지속 안에서 극단적으로 늘려 보여준다. 비가시적 편집은 관객에게 익숙한 것인데 반해, 지속이라는 전제조건은 오늘날 영화 관람 방식에 역행한다. 극장은 영화 관람을 위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언제든지 원하는 때 상영을 시작하고 정지할 수 있는 개인화된 매체와 그에 맞는 플랫폼이 활성화되었다. 반면 <1917>은 연속적 흐름을 감지하는 것을 영화 관람 목적과 일치시킴으로써, 집중된 관람에 최적화된 극장에서 영화를 경험하도록 관객을 부추긴다. 이것이 <1917>이 기술을 통해 시도한 실험의 핵심이다.


고전영화 시기 롱테이크는 물리적 한계로 인해 오직 움직이지 않는 고정숏 내에서만 가능했으나, <1917>은 무빙 이미지의 연속으로 극단적인 롱테이크를 실현한다. 시간의 지속은 이동의 환영이 필요하고, 이동의 환영은 다시 장소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때 장소의 변화는 컷이 없는 영화에서 컷 구실을 한다. <1917>이 종종 공간의 변화를 통해 스테이지 갱신을 보여주는 게임과 유사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이 남기고 떠난 트랩으로든, 강에 즐비한 시체로든 장소에는 늘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땅의 일부가 된 시체 이미지는 경직된 윤리관이나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수사를 요구하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해 인간의 얼굴을 한 공간의 일면을 보여주는 효율적인 이미지 활용에 가깝다. 이에 더해 출연진 중 가장 유명한 배우인 콜린 퍼스와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영화의 시작점과 끝점의 두 공간 속 대표자로 세우며, 공간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배치한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 적진을 가로질러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병사 스코필드(조지 매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의 여정은 2시간 내외의 영화적 시간으로 압축되어야 하며, 그 때문에 물리적인 시간의 단절은 필수적이다. 스코필드가 적군과 대치 끝에 잠시 정신을 잃어야 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전은 단지 시간의 알리바이 확보를 위한 단절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장소의 이면을 드러내며 시청각적 미장센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공간이 낮에서 밤으로 이동함에 따라 기이한 광휘에 휘감긴 공간은 실시간적 리얼리티 구축에서 벗어나 반쯤은 환상에 젖은 여정으로 이행한다. 특히 스코필드가 깨어난 직후 그의 시선을 따라 건물 창가로 서서히 다가가던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는 어느 순간 창문 밖으로 빠져나와 길을 나선 스코필드의 뒷모습과 만나며 환상적인 전환을 새긴다. 한밤중 독일군과 맞닥뜨려 무수한 총격을 받던 스코필드는 총을 한 발도 맞지 않은 채 건물 안에 숨어들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갓난아이를 기르는 한 프랑스인 여성과 만난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상황 속에서 영화는 마치 한 편의 꿈같고, 스코필드의 몸은 애초에 총이 뚫을 수 없는 허상으로서의 디지털 육체의 현현인 것 같다.


이러한 감상을 부추기는 건 스코필드가 남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달리던 순간, 그 운동성이 주는 이질적인 느낌 때문이다. 지금 막 출격하는 병사들이 화면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몸을 던질 때, 스코필드는 그들 앞을 가로질러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달려온다. 스코필드의 움직임은 등 뒤에서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병사들의 반복적 움직임을 소외시키며 그것과 분리된 운동처럼 보인다. 이따금 출격하는 다른 병사와 부딪혀 충돌한 뒤에도 다시 일어나 카메라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달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무한한 제자리 뛰기처럼 보이는 데가 있다. 아무리 달려도, 심지어 폭포 아래로 몸을 던져도 카메라를 벗어날 수 없는 그는 21세기의 저주받은 카메라-인간처럼 보인다. 인간의 흔적이 지워진 카메라라는 자동기계로부터 놓여날 수 없는 스코필드는 20세기의 전장에 파견된 21세기의 육체이며 두 세기는 만날 수 없기에 그의 몸짓은 더욱 절박해진다. 그 절박함이 디지털 육체에 불가능한 소진의 축복을 마침내 허락한다.


영화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내달리는 일방향의 운동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회귀하는 곡선의 운동이 잠재되어 있다. 여정 속에 내포된 메시지는 꿈결처럼 들려오던 한 병사의 노랫말에 실려 온다. 병사의 음성은 귀향을 갈망하는 회귀의 소망을 잔상처럼 장면 곳곳에 방사하며, 누군가가 죽어간 땅에 새겨진 채 메아리친다. 긴 참호를 통과하면서 시작된 여정도 다시 기나긴 참호를 통과해 들어오며 마무리된다. 나무에 기댄 채 눈을 뜨는 것으로 영화 속에 들어온 스코필드는, 같은 포즈로 눈을 감으며 영화에서 퇴장한다. 귀향은 누군가에겐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 찰나의 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는 것만 같은 영원의 레이스다. <1917>이 지속하는 시간과 연속에의 환상을 내달려 보여준 건, 회귀의 여정이 누군가에게는 끝내 완료되지 못한 지속하는 삶이라는 사실이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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