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기름, 박대묵, 아귀찜, 포도주스, 깻잎장아찌의 추억-
첫 만남이 기억나는 사람과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탓인지, 사실 인생의 어느 시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신기하게도 첫 만남이 또렷해지는 1인, 시어머니다. 줄곧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최근 들어 조금씩 깨닫고 있는 중이다.
첫 만남에서 시어머니는 나에게 ‘엿’을 주셨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열 손가락을 몇 번씩 구부려본 결과 내가 벌써 그 당시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어쨌든 내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엿 먹을텨?”에 한없이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신기한 엿이었다. 요즘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마이쮸’나 ‘왕꿈틀이’보다도 더 부드러웠던 것 같다. 풀빵 같았다고 하면 내 기억력이 송두리째 의심받을 것 같지만, 아무튼 입안에서 오물거리고 있다 보니 어느새 부드러워진 엿이 아니라, 처음부터 부드럽기 그지없는 엿이었다. 무장해제한 상태로 입안에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맛도 꾸밈없이 순하고 달콤했다. 강렬한 단맛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는 잔잔한 단맛이었다. 마음속에 동그라미가 마구 늘어갔다.
시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졸지에 시어머니는 초면의 나에게 ‘엿’을 먹인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그 ‘엿’의 그윽한 맛과 내음을 그리워했다. 우리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전두엽, 특히 해마 피질은 후각 등 감각기관의 신경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냄새나 향기는 기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울러 인간의 혀는 5가지 맛만 구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를 통한 후각과 하모니를 자아내며 실제로는 수천 가지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바로 냄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도 종종 느끼곤 한다. 공항 면세점 같은 곳에서 무료함을 달래고자 무심코 뿌려본 향수 때문에 느닷없이 아주 먼 옛날 헤어진 연인을 불현듯 떠올리거나, 지하철을 환승하다가 언뜻 맡은 냄새 때문에 서두르던 발걸음을 문득 멈췄던 기억,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이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마르셀 프루스트도 홍차에 적셔 입안에 넣은 마들렌의 향기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방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기억의 서랍을 열고 자욱한 거미줄을 헤치며 과거를 소환하는 방아쇠, 냄새와 맛은 우리의 몸과 마음 깊숙이에 각인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과거의 자신과 만나게 한다.
며느리인 나와 시어머니는 맛과 음식으로 이어져 있다. 시집가서 난생처음 김장을 했던 날, 어머니는 웃으면서 “여자로서 출세했구먼, 김장도 다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갓 시집와서 어느 날 시댁에 갔을 때 안방 아랫목 근처에 지푸라기가 잔뜩 깔려 있어서, “어머니 방안에 웬 지푸라기가 있을까요?”라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시누이가 “언니 때문에 못살아”하고 깔깔거렸다. 어머니는 “엿기름이여, 식혜...”라고 말씀하시다 한 말씀 덧붙이셨다. “처음 보는감?” 자부심 98%와 못마땅함 2%가 황금비율로 섞인 말투셨다. 모름지기 어머니에게 식혜란, 당연히 보리에 물을 부어 싹이 트게 한 다음 정성껏 말린 엿기름으로 만들어야 하는 법, 갓 시집온 며느리가 그처럼 소중한 ‘엿기름’을 ‘지푸라기’라고 표현하다니. 식혜나 엿을 고을 때 설탕 대신 쓰는 엿기름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먹었던 수제 엿도 필시 그 달콤하고 유순한 엿기름의 맛에서 나왔을 것이다. 훗날 병상에 오랫동안 누워 계셨던 어머니에게 수첩을 가지고 가서, 그 엿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며 꼭 당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하셨기에 수첩을 들고 메모를 하면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았다. 어떻게든 과거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게 도와드리고 싶었다.
사실 시어머니와의 추억은 대부분 음식과 맛, 냄새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충청남도 서천이 고향인 어머니는 종종 고향 장터에서 공수해온 박대 껍데기로 ‘박대묵’이라는 신기한 묵을 만드셨다. 처음 본 ‘박대묵’은 탱탱하고 야무지게 보였지만, 입에 넣으면 미처 씹기도 전에 형태가 무너지는 허술한 묵이었다. 언뜻 보기에 빈틈없고 까다롭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리고 속정이 깊었던 어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엔 너무 흔해 다 내다 버렸다는 ‘아귀’를 하루 반나절쯤, 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삐득삐득’ 하게 말리신 후 쫄깃한 ‘아귀찜’도 종종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의 모든 요리는 손과 정성이 가는 것이었고, 본인이 직접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참기름은 아는 참깨 밭에 미리 주문해 두었다가 참깨가 열리면 택배로 받아 손수 씻고 조리질해서 말린 후 방앗간에 이고 지고 가서 짜야했다. 고추장을 만들려면 ‘콩’ 시절부터 면밀한 추적 조사가 시작된다. 가족 모두에게 헌신적이었으며 매사에 완벽을 기했다. 당연히 몸과 마음이 혹사당했다. 그리고 드러누우셨다.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포도주스는 아는 포도밭에 주문해 직접 씻고 물기 말리고 끓이고 채에 받힌 후 식힌, 눈물겨운 포도주스였다. 홀짝 마셔버리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포도주스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미운 말’로 들릴 법한 말씀도 종종 하셨다. 그런 말씀의 이면에 감춰진 어머니의 슬픔, 어머니의 가여운 인생을 20대의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솔직하게 말해 남편을 봐서 ‘성질(!)’을 꾹꾹 참았던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시집살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법한 시간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헌신적인 분이셨지만, 가족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분이었다. 어머니의 ‘미운 말’에 대한 남편의 조언, “엄마가 뭐라고 해도 그냥 다 잘해달라는 얘기로 들어”가 정답이었다. 속상하면 나만 손해인 것이다. 나이 들어 조금은 유들유들해진 지금이라면 훨씬 더 능숙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젊은 시절에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가 다소 힘겨웠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고부관계처럼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아들 손자를 원하셨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깻잎을 많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있더라고 중얼거리자, 한참 뒤에 앞마당에 깻잎 밭을 만들어 놓고 나를 불러 깻잎을 따서 장아찌를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아들이 꼭 있어야 하냐고 여쭈어보자, 손자가 없으면 장례식에서 누가 영정사진을 들겠냐고 하셨다. 결국 나는 마흔 살이 되던 해 아들을 낳았다.
장례식 날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든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나 서글펐던지. 다른 집 손자들은 다 장성한 청년인데, 우리 아들은 열 살 남짓한 아이였다. 어머니, 제가 너무 늦게 낳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너무 빨리 가신 게 아닌지요.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어떤 관계였을까.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타인에게 받고자 한 사랑의 무게만큼 결국 그 사랑을 받아낸다고 한다. 살아서 못 받으면 죽어서라도 받는다고 한다. 정말일까?라고 생각하며 나는 맨 먼저 우리 시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고야 만다. 돌아가시면 너무 그리워질 것 같은 분, 좋든 싫든 나에게 농밀한 감정을 남기고 가실 분... 어느새 이렇게 깊은 곳까지 오셨던 것이다. 때로는 동물적인 감각이 훨씬 정확할 때가 있다. 사십구재까지 마쳤지만 여전히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 같고 더더욱 그리워진다. 살아계실 때 제대로 못 드렸던 사랑을, 결국 어머니는 다 받고 떠나실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장례식 직후 아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내 자식의 4분의 1은 어머니였다. 그토록 소중한 분이었던 것이다. 나이 들수록 아버님과 똑같이 닮아가는 남편을 보면, 문득 어머니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였다. 어쩌면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저는 어머니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어머니는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네요. 정말 죄송하고 감사해요. 제가 어머니의 인생을 소설로 써 드리지는 못할 것 같지만, 어머니를 오랫동안 그리워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어머니가 힘들게 해도 그 아드님을 보고 참았는데, 이제는 어머니 때문에 어쩌면 그 아드님을......, 유행가 가사처럼 알 수 없는 인생이네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아무튼 어머니 옆자리, 찜이요. 다시 뵐 날까지 도 닦으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