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버린 풍경 속에서도 여전히 자라는 것들
곡우는 봄의 끝자락이다. 입하는 여름의 첫머리다. 그 둘 사이, 며칠 남짓한 시간은 무심한 듯 흘러가지만, 어느 순간 스치듯 마음을 흔든다. 봄이라 하기엔 볕이 너무 뜨겁고, 여름이라 하기엔 바람 끝이 아직 서늘하다. 아침에 문을 나설 때 반소매를 입자니 으슬으슬하고, 긴 팔을 입자니 한낮의 해가 등에 따갑다. 거울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시간. 어쩌면 인생도 꼭 이런 시기와 같다. 지나간 계절을 붙잡기엔 늦었고, 다가올 계절을 맞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그 사이의 머뭇거림. 그러나 묘하게도,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이다.
예전의 시골은 곡우 즈음이면 말없이 바빠졌다. 이른 아침부터 소금물에 볍씨를 담가 까락과 쭉정이, 병든 알곡을 가려내는 염수선 작업이 이어졌다. 소금물 위에 둥둥 떠오른 것들은 조심스레 걷어내고, 무게 있는 볍씨만 남긴다. 무거운 것은 남고, 가벼운 것은 떠난다. 인생도 이처럼 단순했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이다. 깨끗이 헹군 볍씨는 곧바로 온탕소독에 들어간다. 뜨거운 60도 물속에 볍씨 자루를 담그고, 10분간 익지 않을 만큼만 익힌다.
불을 지피고 물 온도를 맞추며 손끝으로 볍씨를 만지던 그 시간에는, 사람의 체온과 흙의 냄새가 있었다. 요즘은 농업기술센터의 대형 소독기를 이용하면 30분 만에 끝나는 일이지만, 그때는 온기와 기다림, 손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온기를 머금은 볍씨는 이틀쯤 지나면 못자리로 나갔다. 논 한쪽에 흙을 곱게 다지고, 물을 대고, 그 위에 손으로 조심스레 뿌렸다. 볍씨 하나하나에 마음이 담겼고, 그 마음이 흙을 깨우고 계절을 불러냈다.
아이들은 그 곁에서 고들빼기꽃을 꺾고, 흙을 만지며 봄을 배웠다. 논둑을 따라 걷던 발바닥엔 흙이 들러붙고, 손끝에서는 고들빼기 특유의 쌉싸래한 향이 났다. 한 번 캐내면 다시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 여린 풀을 조심스레 다루며 아이들도 '심고, 자라고, 뽑히는' 삶의 순리를 배워갔다. 논두렁의 물길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계절을 달력보다 먼저 알아챘다. 봄이 와야 할 때 왔고,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렸던 시절.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너무도 멀어진 풍경처럼 느껴진다.
산에서는 자작나무와 박달나무에서 수액을 받았다. 곡우물이라 불린 그 물은, 한 병 채우려면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할 만큼 귀한 것이었다. 그 맑고 묽은 물을 병에 담아 아궁이 옆에 조심스레 놓고, 어른이 기운이 없을 때 조금씩 마시게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아니라, 나무의 속에서 올라오는 물. 생명의 심장을 나누는 일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2025년의 시골에서는 트랙터가 논두렁을 휘돌고, 밭갈이는 하루면 끝이 난다. 못자리는 더 이상 집에서 손수 만들지 않는다. 모판을 전문으로 키워 파는 농장이 있어, 거기서 받아온 모를 트럭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이앙기가 논 위를 지나가며 똑같은 간격으로 모를 심는다. 사람의 손보다 기계의 바퀴와 쇠팔이 먼저 논에 들어간다. 풍경은 바뀌었고, 농사의 리듬도 조금 달라졌다.
더 이상 논은 온전히 논이 아니다. 못자리를 만들던 그 땅에는 이제 거대한 비닐하우스가 들어섰다. 상추며 오이, 딸기, 그리고 수박 같은 시설작물들이 줄지어 자라고, 새벽이면 하우스 지붕 위로 김이 피어난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논두렁까지 울리고, 스마트폰으로 온도와 습도, 물주기까지 조절된다. 농사는 여전히 사람을 먹여 살리지만, 방식은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모가 자라날 논바닥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엔 여전히 말 없는 기도가 스며 있다. 흙을 읽고, 물의 기운을 감지하며, 볕의 세기를 가늠하는 감각. 비닐하우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줄지어 선 수박의 새순을 바라보던 어르신이 문득 고개를 돌려 말한다.
"잎 끝 색 보이소, 아직은 좀 이르데이. 조매 기다려야 쓰겄다 카이."
그 말 한마디에는 흙을 살아온 시간과 계절을 견뎌온 감각이 담겨 있다. 습도계도, 온도조절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명의 미묘한 징후를, 사람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차린다.
아무리 기계화된 세상이라도, 논과 밭의 작물은 여전히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랑 사이를 천천히 걷는 사람의 발걸음 속에 흙은 안심하고, 줄기와 잎은 방향을 잡는다. 그 고요하고 느린 걸음이야말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농사의 언어다.
도시의 아이들은 그런 풍경을 잘 모른다. 곡우 즈음이면 시험을 앞두고 교실과 학원을 오가며 바쁘다. 하늘에 비가 오는지, 논에 물이 고였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들의 걸음은 흙이 아닌 인도와 교실 바닥을 밟고 있지만, 그들 또한 자라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못자리에서.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아들 준서는 대학원 실험실에서 이른 아침부터 밤 늦도록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명을 관찰하고 있고, 딸 서정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한창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아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흙은 아니지만 시간이라는 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준서는 실험 노트를 꼼꼼히 적고, 반복되는 데이터 속에서도 생명의 신호를 포착하려 애쓰고 있다. 서정이는 취업시험 준비를 하며, 자신이 설 자리를 하루하루 모판처럼 다듬어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나는 요즘 마당 한 켠에서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을 바라보며 계절을 느낀다. 한때 고들빼기를 캐러 다니던 내가, 이제는 그 고들빼기꽃을 뽑지 않고 그냥 두고 본다. 그 작고 여린 것들도 그 나름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잡초라 불리는 들풀도 누군가에겐 봄의 마지막 꽃일 수 있다.
입하는 어느새 가까워지고 있다. 볕은 점점 뜨거워지고, 논의 물빛은 반짝이며 여름을 향해 움직인다. 바람은 얇아지고, 사람들의 얼굴빛도 달라진다. 땅이 변해도, 계절은 충실하다.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오늘도 모를 심고, 새순을 살피고, 기다리고 있다.
곡우와 입하 사이라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지나간 계절과 다가올 계절 사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 그 머뭇거리는 오늘. 아직 덜 자랐기에 가능성이 있고, 아직 미숙하기에 더 사랑스럽다. 곡식도 사람도 그렇게 자란다. 비가 내리고, 볕이 들고, 바람이 지나가고,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고. 그렇게 자라나는 시간, 곡우와 입하 사이. 그 짧고 애틋한 틈이,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