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2 기울어진 성의 계단

by 청사

1

나는 생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을 이어가는 데 힘이 들었다. 생존하는 데 힘이 되었던 좌파 의식의 존재가치가 몹시 흐려진 상태에서 변화는 최고의 미덕이었다. 자존심은 현재의 생명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망상에 불과했다. 어느 사이에 생존 논쟁은 철학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현실적 삶에서 이루어졌다. 거대한 사상연구라는 사치에서 벗어나 매우 살벌하고 까다로운 현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이상적인 경제 호황을 의미하는 버블(bubble) 경기가 촉발되면서 각종 시장에는 풍요로움이 판을 쳤다. 길가에 나뒹구는 일본인의 환한 웃음에서는 진짜나 가짜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은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고, 돈을 쓰고 싶다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움켜쥔 상품들은 전리품처럼 상처 입은 평화로움의 증거로 보였다.

누구나 이 호경기와 거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해도 될 것 같은 착각을 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구매를 했고 통이 큰 씀씀이 통했다. 도쿄의 심장부인 신주쿠에는 거세게 밀고 오는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이 스펀지처럼 골목길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런 틈 사이에서 사치와 허세가 재생산되어 범람한 채 사람들을 환희와 혼돈 속으로 빠트렸다. 분명한 것은 그 파티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유독 가혹했던 일자리도 넘쳤고, 점주나 자영업자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었다. 견고한 조직 생활에 지쳐버린 사회초년생들은 자유로운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조직을 과감하게 박차고 뛰어나왔다. 얼마나 버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자유롭게 노동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근로 현장에는 인력 부족으로 큰 구멍이 생겨나면서 기업사회가 흔들렸다. 역시 그런 흐름은 남의 것이었다.

여전히 보수가 좋으며 품위가 있고 화려한 일(仕事)은 일본인이 독점했다. 노동시장에서 일본인은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노동환경에 힘입어 호사를 누렸다. 대신에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거나 구질구질한 노동은 외국인이 하면 된다는 차별적 노동관도 동시에 정착됐다. 외국인은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 작동하는 먹이사슬에 운명이 놀아났다.

약자로 박제된 외국인은 일본 사회가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노동 관행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박탈되고 있는가를 인식하기를 의도적으로 꺼렸다. 노동 현장에서 일본인과 외국인, 자국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라는 인종적 구분이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항하거나 호소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일본경기 호황을 통해서 아르바이트 찾기에 실패한 사실을 잊거나 자신이 설 자리가 바늘구멍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는 계기와 동기를 찾지 못했다. 노동시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학문을 해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도쿄에서의 현실은 꼭꼭 숨겨 간직해 온 희망의 온도를 싸늘하게 식히고 몸을 움츠리게 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풍요로움이 일상에서 판을 치면서 성 상업화가 시대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듯했다. 네온사인에 기대어 돈을 좇는 불나방을 관능적인 척도로 육체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을 용인하는 비정함은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가 되었다. 이성 상대를 욕망으로 관조하고 향유하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난 듯했다.

그것의 시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무의식이 하나의 도덕으로 형성되었고, 들어내도 흠이 되지 않는다는 무도덕이 하나의 양심으로 질서화되는 듯했다. 도덕과 양심의 변화 속에서 욕망을 화려하게 해결하기 위해 돈으로 신체를 사고 신체를 돈으로 파는 육체 시장이 이미 정당화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제어된 욕망이 있을 뿐 해소되는 욕망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원색적인 성(性) 놀이를 하는데 현실에서 확보한 풍요로움과 준비된 방탕이, 그리고 무자비한 돈과 나약한 육체가 소통하는 기회가 됐다. 거기에는 삶의 논리나 도덕의 논리가 아니라 돈의 논리가 좌지우지했다.

어느 심야방송에서는 여장남자를 지칭하는 오카마(オカマ)가 출연하여 접대한 고객으로부터 받은 롤렉스시계, 벤츠 자동차, 아파트 등을 소개하며 자랑했다. 무슨 대가인지는 거품을 물고 입으로 토하는 흥분된 어투에서 추측할 뿐이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그들의 존재가 풍요로움이나 버블 경기의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매우 정당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성 반란이 아니라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접대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하게 호소했다.

그들을 용인한다는 의미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직업 선택을 하거나 성에 대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서 편견 없이 인정해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는 미쳐 생각하지도 못했던 젠더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삶을 통해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투쟁을 하고 있었고, 도쿄의 밤 문화 중의 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인식했다. 다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인 성 개념과 질서에 대한 도덕적 시비는 별도로 하더라도 그런 변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매일 드나드는 곳이며, 현란한 빛으로 거리를 수놓은 가부기죠(歌舞伎町一番街)에서는 다양한 삶이 존재했다. 그곳에서는 관능적 몸짓이 잘 어울렸고, 진하게 파고드는 불빛으로 몸과 마음을 흠뻑 적시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웠다. 어둠침침하게 숨겨진 욕망이 밖으로 드러나 달궈져도 좋을 만한 곳이었다.

길거리에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 야한 생각을 가진 성인(性人)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밤하늘 의 별을 쳐다보며 흔들거리는 눈빛은 성 사냥의 서막이었고, 묵직하게 옮기는 발길은 사냥감을 좇기 위한 화살로 돌변했다. 한밤중에 방향을 잃은 불나방이 불빛에 돌진하여 몸을 태우듯이, 많은 가능성이 있는 돈을 가진 보통 사람이 달아오른 욕망을 태울 곳을 찾았다.

욕망과 돈이 거래되는 시스템이 잘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돈으로 성 사냥이 가능하고, 육체적 학대가 가능하고, 성 탈취가 가능하고, 성적 모욕이 가능한 곳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성(性)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동하고 있는 육체 타는 냄새가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성은 돈이 된다.’는 가장 단순한 반대의 논리와 잘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돈을 벌기 위해 성을 판다.’는 인식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성을 돈으로 산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개인적인 성도덕이나 성 양심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그것으로 옳고 그름의 답을 내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만 돈과 신체가 거래되는 성도덕과 성질서가 통용되는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천태만상의 성문화가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자신감 있게 욕망을 내보여도 흠이 되지 않았다. 긴장된 아랫도리를 해결하기 위해 돈으로 소통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주머니에 나뒹구는 돈을 기꺼이 꺼내려는 허술한 마음이 통했다. 여기에 들어서면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어먹은 ‘어머니의 이놈 새끼’라는 푸념 소리가 사라졌고, 자신도 모르게 쌓아 올린 도덕이나 양심의 벽이 허점을 보이는 것을 느끼곤 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성 세계를 알 수 있는 위기인지 기회인지 모르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붉은 글씨로 된 노조키(覗き, 엿보기)라는 간판이 크게 보였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의미로 해석이 됐지만 망설이다가 일본인 동료에게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 너도 하고 있잖아!”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감이 안 와. 그렇다면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빠를 거야!”라고 하며 끌고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어둠과 불빛이 깔린 무대에서 관능적으로 몸을 놀리고 있는 무희가 눈 속으로 훅 들어왔다. ‘아 이것이구나!’라고 인식하는 순간 진퇴양난이 되고 말았다. 보고도 싶었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에 의지하는 척하면서도 신속하게 그 무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집중해서 꼬나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노조키는 무희의 신체를 뚫어지게 구경하는 쇼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 적응하는 데는 도덕적 멈춤이나 비겁한 망설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것이었고, 마음의 흔들림에 대해서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반나로 춤을 추고 있는 무희는 마치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처럼 곳곳을 적시며 묘한 여운과 향기를 남기고 지나갔다. 역동적으로 공간을 누비는 요염한 자태는 남성들의 사나운 눈빛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적절하게 숨긴 신체는 보일 듯 말 듯 부끄러워하는 새색시 얼굴처럼 세상 밖으로 훌러덩 나오는데 망설이는 듯했다.

무희는 보여줘야 하는 곳과 보여서는 안 되는 곳을 율동과 리듬으로 조절을 했다. 시간이 흘러 수위가 높아지면서 잘 보이는 부분은 내팽개쳐졌고, 새로운 곳을 향해 눈빛과 욕망이 달려갔다. 가끔가다 속 터지는 취객의 탄성은 무희의 가치를 높였다. 그렇게 신체 쇼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밖으로 주저 없이 불러냈다.

옆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앞뒤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지그시 감은 눈으로 응시를 하면 되었다. 무희가 움직이는 대로 마음과 몸을 맡기면 되었다. 무희의 극도의 자극에 욕망을 맞춰가면 무희와 관객의 교류가 성사되었다. 무념무상을 불러오는 무희의 움직임은 호기심과 욕망의 척도를 무의미하게 했다.

무희의 몸뚱이가 눈앞으로 점점 다가왔다. 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형씨 당첨이야. 기회가 왔어!”

“....”

“터치! 터치!”

눈앞에 있는 무희와 대치하면서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몸에 손을 대라고 소리로 들렸다. 눈은 무희의 몸으로 가고 있었지만 손가락 마디마디는 얼어붙어 방향을 잃고 있었다.

무희가 정해놓은 유혹으로 관객의 욕망을 폭발시키는 광란의 시간이 된듯했다. 그러나 어떻게 할지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다시 “마네!(money), 마네!”라는 소리가 들렸다. 돈을 주라는 소리였다. 나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주머니에 있는 모두를 꺼냈다.

무희와 나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약간의 전율이 일었다. 무희는 천천히 내 손을 끌어 자신의 몸에 갖다 댔지만 체온을 느끼지 못했다. 냉정인지 열정인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신체 온도로 있었다는 것만을 알았다. 이성을 잃은 듯이 형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와이파이와 같은 접촉은 어느새 몸의 근육을 극도로 경직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무희는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을 만지며 붉은 입술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아주 작은 말로 속삭였다.

“좋니? 스케베(助兵衛, 호색가)씨!”.

“....”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듯 여유로운 무희의 몸짓은 은밀하게 공포심과 자책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 보기를 외면하는 순간 뚫어지게 보던 무희의 눈빛이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나는 무희의 신체를 엿보기 했고, 무희는 나의 마음을 엿보기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승부가 아니라 완패였다.

마지막 숨겨진 관능적인 속살을 들어내면서 슬픔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희의 눈에는 촉촉함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빈 가슴을 밀도 있게 채워 준 무희의 눈빛은 슬픔이었고, 커다란 무대를 채운 나의 눈빛은 욕망이었다. 공간을 채우는 슬픔과 욕망은 그렇게 공존하고 있었다.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를 지각할 수 있었다. 호기심으로 위장한 자유와 본능적으로 발현된 욕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애당초 붉게 쓰인 노조키 간판을 보면서 생긴 망설임의 이유를 분명하게 알았기에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주위에 걷고 있는 사람들이 노조키 쇼 장에서 달려 나온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다는 의식이 정확하게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무희의 몸체를 봤던 욕망의 눈은 이미 사라지고 눈치를 보는 당당하지 못한 눈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목격되고 있는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따가운 시선이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내달려 겨우 사람이 없는 모퉁이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

그러나 평범함을 찾아 도망친 평범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머리를 여전히 아프게 했다. 더욱이 여성의 노출을 탐닉하기 위해 돈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왠지 엎어진 물을 담고자 하는 아쉬움이나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반성도 하기 싫었다.

다만, “성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과 돈의 거래는 정당한가? 무희의 은밀한 곳을 보고자 했던 마음은 탐욕일까 아니면 본능일까?” 조금 전의 욕망으로 불탔던 내가 갑자기 성인군자처럼 절개 있는 마음으로 해결하지 못할 화두를 꺼내 청승을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외설, 관음증, 도착증, 성 놀이, 성 자유, 섹스, 욕망, 본능, 양심 등 가끔 자신을 움직였던 다양한 용어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자신의 현 상황을 덥거나 변명해 줄 수 있는 용어가 없었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신체를 상상하면서 가끔 보름달처럼 밀려와 탈출구를 찾던 모습이 오히려 편안했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 손을 뿌리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고 선택한 절제는 욕망이었다. 호기심을 빙자한 자유는 쾌락이었다. 마음대로 한 실행한 본능적 행위는 성놀이였다. 일본인 지인에 의탁한 마음은 나약한 자신이었다. 속마음대로 움직인 것은 내 모습이었다. 내 안에 조용히 있던 자유, 본능, 호기심, 청춘, 마음, 도덕, 양심 등은 비난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결함 많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내 안에서는 자유가 길을 잃으면 욕망이 됐고, 욕망이 길을 잃으면 자유가 됐다. 욕망을 잃은 자유가 꽃을 피우면 선이 됐고, 자유를 잃은 욕망이 꽃을 피우면 악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자유와 욕망은 그렇게 동행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실행에 옮긴 엿보기 행위는 자유이기도 했고 욕망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편적 도덕이라는 잣대로부터 해방되는 성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 욕망을 채우기 위해 허용되는 성의 자유는 있는 것일까? 성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일까? 성의 자유에 대해서 규정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성의 자유는 성을 평화롭게 하고, 성의 욕망은 성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굳게 믿고 싶었다.

내 앞에는 여러 갈래로 갈 수 있는, 인생의 흔적이 쌓이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는, 삶의 다툼으로 거미줄처럼 인연이 얼룩져지고 있는, 가치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도덕과 비도덕에서 망설이고 있는, 욕망과 자유를 혼동하고 있는, 거친 현실과 예상하기 어려운 미래가 있는 도쿄가 있었다.

여기에 살면서 나쁘다고 인식한 경험들이 타인에 의해 자유의 본지가 왜곡됐다는, 편파적 유혹에 일시적으로 빠졌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좋다고 인식한 경험들이 자신에 의해 잘 달린 결과라고 칭찬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나의 심장에 남아 희망과 절망을 주고 있고, 애증으로 쌓아가는 성(城)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2

나를 강하게 묵어놓았던 세계를 해부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과 사고체계를 지배했던 사상의 실체와 현주소를 파악하기 위해 지식의 성지이며 지식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간다(神田)로 발길을 옮겼다. 지하철의 노선이 겹쳐있어 이정표를 보고도 방향을 잡지 못했다.

“간다를 가려면 어떻게 가나요?”

“저를 따라오세요.”

“같은 방향인가요?”

“아니요. 모르는 것 같아 안내해 드리죠.”

일본인의 다양한 마음이 표출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거절했던 일본인의 마음과 대조적이어서 놀랐다. 내가 모르던 일본인의 심성을 느끼는 순간이어서 매우 신선했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지하철 터널을 빠져나왔다.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눈앞에 펼쳐진 지성의 거리에는 단순했다. 소문만큼이나 많은 서점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울긋불긋한 간판이 맞서고 있었다. 서점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날 일이 없다는 듯이 좁은 거리를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몸놀림으로 오고 갔다.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서점의 문은 사상적 대립이나 갈등이 없다는 듯이 활짝 열려있었다. 서점 문 앞에는 손때가 묻지 않은 책들이 대세라며 데려가 달라고 웃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기대했거나 관심을 끌 만한 책이 없었기에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은 초점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게 눈처럼 나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어느샌가 포근하게 쾌쾌한 고향 같은 책 냄새가 콧구멍으로 스며들면서 긴장된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취하고 싶은 냄새는 강도를 더했다.

“그래 이 냄새야. 나를 중독시켜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이 냄새야.”라고 중얼거렸다. 서점 주인은 쾌쾌한 냄새를 내는 책과 닮아 있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제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내가 노리는 것은 중국인 학생을 만나면서 느꼈던 것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가 되는 좌익 사상을 담은 책이었다.

여전히 기대와 희망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대했던 책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갯 속으로 들어가듯이 시야에는 없었다. 내가 반길 수 있는 책이나 나를 반겨줄 수 있는 책은 없는 듯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일상적인 교류, 중국인과 대만인의 커플 충격’이 뇌 속에서 재생되면서 갑자기 눈과 몸이 굳어졌다.

실눈으로 책꽂이의 좌우를 살피는 가운데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구석에 한 권이 꽂혀있었다. 그 순간 간절함을 담은 내 마음이나 구석에 있는 책은 처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찾는 이가 없어 버림받는 것일까? 지성인의 성지로 여길만한 매력이 사라진 것일까? 사상으로서 유효기간이 지난 것일까?’ 온갖 추측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이 작은 서점에서는 사상 간의 싸움이 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했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적들이 힘겹게 뒷줄에서 버티기를 했다. 지식인의 눈길을 끄는 서적과 그렇지 않은 서적 사이에 이미 서열이 정해진 듯했다. 사상 간의 서열이 헌 시대를 버리고 새 시대를 불러온 듯했다.

시대성을 담고 표현했던 사상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뜨거운 젊은이의 피를 먹고살았던 좌익사상이 차갑게 식었다. 이미 세파를 흩고 간 죄로 한구석에 숨어있었고, 새로운 시대 흐름이 상처받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지성의 거리로 살아온 간다(神田)의 속살은 사상과 시대의 싸움으로 마구 헤집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양한 색깔로 살아가는 간다를 보면서도 좌익사상의 불용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구석 맨 위에 꽂혀있는 유명한 좌익서적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 책을 볼 수 있을까요?”

“저거요? 에... 20여 년 간 저 책을 보자고 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예?”

“다른 책을 사면 덤으로 드릴 수 있어요.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서점 주인의 한마디에 가슴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서점에서 마르크스(K.Marx.)와 그의 사상은 버릴 수 없어 가지고 있는 쓰레기에 가까운 존재였다. 존재가치와 사용가치가 사라져 공짜로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서점 주인의 말은 사상의 가치뿐 아니라 시대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가늠하기에 충분히 차고 넘쳤다.

몹시 갖고 싶었던 책은 그렇게 오랫동안 버림을 받아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미 도쿄에는 죄익사상이 사라졌다. 빛이 바래 보이지 않았고 힘을 잃어 작동하지 않았으며, 매력을 잃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사상이 되어버렸다.

간다 현장을 통해서 책을 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내용을 보며 지식을 이야기하며, 흐름을 보며 시대를 이야기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책을 보며 절망을 했고, 내용을 보지도 않고 포기했고, 흐름이 부재한 시대를 세차게 버리고 있었다.

사상을 소중히 하고 있는 현실은 사라진 과거가 되었다. 앞으로 다가와야 할 미래는 이미 가치를 잃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좌익사상에는 과거만 존재했고 현실과 미래는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이 끔찍한 현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난감했다. 현해탄을 건너야 미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건너기 이전부터 망상이었다.

마르크스가 관속으로 들어갔듯이 그의 사상도 관속에 갇히고 말았다. 마음으로 간절하게 소환했던 사상이 사라졌다. 자신을 인도했던 사상이 죽음이라는 굴레로 떨어졌다. 마르크스의 죽음이 그의 삶을 매듭지었듯이, 사상의 죽음이 한 시대와 자신의 미래를 매듭지고 말았다.

나는 사상의 죽음과 시대의 죽음이 신념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치가 떨리도록 전율을 느꼈다. 사상의 죽음은 아무도 그것을 찾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시대의 죽음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했다. 신념의 죽음은 자신을 지배해 온 목표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에서 벌어진 두 번의 커다란 나의 조난은 상상할 수 없었던 생명줄과 같은 빛으로 반짝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것은 과거에 묶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해방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동기가 되고 있었다.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던 좌익사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 반대하고 있는 것, 대결하고 있는 것, 서로 미워하고 있는 것 들로 구성된 투쟁 의식이, 평화의 선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나를 지배해 온 지루한 사상전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려고 했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변화라고 말하고 싶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지성의 현장에서 사상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생명의 길이에 대해서 알 수 없었지만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의 간다를 밟아버린 새로운 사상은 무엇일까?’가 궁금해졌다. 언제나 잘 버티고 있는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의 반대편에 평화가 있듯이, 과거의 반대편에 미래가 있듯이, 사상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흔들어버린 반대편에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래버린 지식을 대신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상적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뒷걸음질 치면서 새로운 유효기간을 가진 흐름이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보고 싶다고 충동을 일으킨 것은 간다를 감싸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그것이 간다의 속살까지 울긋불긋 적시고 있었다. 그것은 지성의 논리 위에 있던 간다를 상업 논리와 감성 논리로 새롭고 화려한 궤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알룩달룩한 색깔을 가진 새로운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에 들어서니 입구부터 낯 뜨거운 그림들이 눈을 현혹했다. 입구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매장에는 여인들의 화려한 몸체로 채워져 있었다. 성인용의 DVD, 테이프, 성영화, 성화보, 성잡지, 춘화 등이 당당하게 맞이했다. 성(性)의 성(城)이었다.

새롭게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단어들이 가슴팍을 사정없이 찔렀다. 러브, 방탕, 환락, 감성, 감각, 욕망, 성놀이, 성의 자유, 섹스 등과 같은 단어들이 풍미했던 사상과 시대를 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사상이 본능과 욕망으로 대체되었고, 화려한 감성세계로 전환되고 있는 듯했다.

간다는 그렇게 감성의 시대에 눌려 새로운 호흡을 했다. 자신의 호흡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성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을 채웠다. 성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검푸르고 차가웠다. ‘성의 끝은 쾌락인가 아니면 성의 파멸인가?’라는 성 미래를 상상해 봤다.

자신이 연구해야 할 영역이 ‘이것은 아니야!’ 하면서도 대안이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 이성의 세계에서 감성의 세계로 빠졌듯이 나는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세계는 성의 세계라는 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감성이 이성을 이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다를 떠나면서 눈을 감고 좌익시대와 감각 시대를 상상해 봤다.



3

거대한 문어가 한 여인의 몸체를 정성을 들여 다정하게 포옹했다. 인간의 욕망과 비인간의 본능이 접점을 만들어 낸 <해녀와 문어>의 한 장면이었다. 완전한 인간 모습을 한 해녀와 해녀의 사냥감이 되어온 문어가 짝이 되어 밀회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은 깊은 교감을 하고 있는 듯이 문어에게 육체를 내어 줬다.

세상을 받아낼 만큼 넓고 푸짐한 육체를 향해 부릅뜬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시하며 주둥이를 들이대는 문어는 이미 바닷속 뼈대 없는 생물이 아니었다. 여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성물이었다. 여인이 숨기고 있는 농후한 요염함과 욕망을 빼앗을 듯이 수많은 빨대로 집요하게 농락했다.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여인에게는 단 한줄기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뼈대가 없는 문어에게도 티끌만큼의 부족함도 없었다. 성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문어는 여인을 취하기보다는 차라리 사랑했다. 여인에게는 이미 다른 세계의 생물이 아니라 어엿한 존재로 있었다. 여인과 문어가 내뿜고 있는 호흡은 길게 이어져 비상했다. 차가운 바다에서의 살벌한 투쟁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방에서의 아름다운 교감이 있을 뿐이었다.

<해녀와 문어>의 세계는 청사초롱, 오징어, 함을 들어준 대가로 얻어낸 금전으로 부풀려진 허영과 욕망이 결코 아니었다. 이성 간의 교류보다도 더 자연스러웠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확인하는 달콤한 교감은 결코 사창가의 충동적 욕망이 아니었다. 도화지에서 살아가는 사랑이고 삶이지만 진중한 사랑이고 삶이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야기였다.

매우 사치스러운 키모노를 입은 남녀가 숨어서 몰래 하는 비밀 사랑을 했다. 위엄을 들춰내듯 묵직하고 품격이 있는 키모노를 거칠 사나이가 여성의 몸체를 노골적으로 탐했다. 울긋불긋 화려한 키모노를 입은 여성은 남성을 받아들이려 온몸으로 애원했다. 이윽고 남자와 여자는 사나운 불꽃을 튀기며 공간을 불태웠다.

정상(頂上)을 향해 달려갈 무렵 시퍼런 칼을 든 사무라이(侍)가 남녀의 행위를 사납게 노려봤다. 칼끝은 남녀의 몸체를 노리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칼끝처럼 성깔이 난 사무라이는 남녀의 욕망이 만들어내고 있는 불륜 앞에 주저 않았다. 성적 탐욕을 일으킨 바람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타인의 성은 매혹적이기에 부당하게 취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혹되어 취해버린 타인의 성은 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허용되지 않은 성을 취했기 때문이다. 정당하게 교류하는 성은 성스럽고 부끄러움이 없다. 서로를 허용한 성이기 때문이다. 성생활을 하는 세계에서 타인의 성은 언제나 미추(美醜)의 경계선에 있어 다루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이것이 두 번째 이야기였다.

버드나무 가지 아래 빨래터에 한 여성이 묘한 자세를 취하고 앉았다. 여인의 눈빛은 물가에서 짝짓기 하는 모습에 몰두했다. 개들이 품어내는 발정에 여인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몸체는 흔들거리며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 여인의 욕망이 대응한 상황은 동물의 본능을 능가했다.

인간은 성의 모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동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론일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성은 아름다우며 추하고, 추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동물의 성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미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물가에서 벌어진 인간의 본능과 동물의 본능은 매우 닮아 있었다.

절제하는 성은 가치를 높여왔고, 궤도를 이탈한 성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비난을 받았다. 절제하는 성에는 가늠할 수 있는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밖으로 나온 성에는 가늠할 수 있는 욕망과 추함이 있다는 전통적 기준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것이 세 번째 이야기였다.

방안에 두 남자가 무엇인가에 홀렸는지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한 남자는 옆으로 기울인 몸체를 내주며 다른 남자를 유혹했다. 다른 남자는 요염하게 누워있는 남자의 육체를 향해 눈빛으로 간을 봤다. 한 손을 남자의 몸에 살며시 얹었다. 두 남성의 손길과 눈빛은 서로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들만이 아는 방식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그들의 가슴팍에는 설렘과 뜨거움이 일어나는 듯 절규를 했다. 동성 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간절함이 소통하여 흐르고 있는 듯했다. 성에는 구별이 없다는 것을 부르짖는 행위였다. 이것이 네 번째 이야기였다.

풍만하고 탐스러운 한 여인과 가냘프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다른 여인이 서로 보며 몸과 마음을 열었다. 두 여인이 나누는 눈빛에는 만족감이 있을 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서로의 만남이 어떤 경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그녀들의 부딪침은 고요했고 음침하지 않았다. 두 여인이 가는 길은 결코 탐욕으로 손잡고 가는 길이 아닌 듯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이야기였다.

남녀는 키모노(着物)로 숨겨진 사타구니 사이로 살포시 밀당을 이어갔다. 두툼해진 감성이 신체를 움직이며 폭발적인 만남을 만들어냈다. 남녀의 향기로운 입김은 헛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가닥 한가닥 서로에게 뿜었다. 깊이와 농도를 더해가는 가늠하기 어려운 한 쌍의 몸, 입술, 손은 완성체를 향해 질주했다.

이성이 있어야 하고 감성이 살아야 성립되는 그런 세계였다. 거기에는 자극적이지 않은 작고 평범한 사랑이 있었다. 노출되어도 욕되지 않는 부드러운 육체의 향연이었다. 공짜로 얻을 수 없는 세계였다. 남녀의 성은 분해되고 산화되면서 품위 있는 불꽃놀이로 승화됐다.

거기에는 결코 타락이나 탐욕으로 만들 수 없는 즐거운 미지의 성이 있었다. 재단하거나 감흥으로 가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겉치레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접근해야 완성되는 그런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랑을 담았고, 욕망을 부리지도 않는 육체의 미였고 남녀가 만들어낸 예술이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이야기였다.

내 손에는 지금까지 현혹시켰던 죄악사상을 담은 책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성으로 풍미하고 있는 여섯 계단의 이야기가 있는 춘화(春畫)가 들려있었다.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봄꽃을 꺾는 모습이기도 했다. 미지의 성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고, 욕망을 탐하는 세계였다. 차가운 냉소가 구석구석 피의 흐름을 멈추게도 했고, 머릿속에 뜨거운 욕망을 구석구석까지 흐르게도 했다.

춘화의 세계는 인간 성의 차갑고 뜨거운 광기의 맛을 보여줬다. 자신에게 춘화의 세계는 사랑이었고 욕망이었다. 이성으로 접근하거나 감성으로 재단할 수 없는 문명이었고 야만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이 숨기거나 갈구하고 있는 성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사는 성의 주인공은 흔들리는 도덕성으로 규정한 변태와 정상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곡예를 하는 듯했다. 평범한 성과 그렇지 않은 성의 세계에서 희망과 치유를 찾는다고 이해하고 싶었다. 인간의 성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춘화의 주인공처럼, 인간은 ‘타 생물과의 밀애, 불륜, 이종 간의 자극, 동성 간의 사랑, 범민의 사랑’이라는 다양한 성의 계단에 언제든지 오르거나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위험을 감수하며 여섯 이야기를 맞춰 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안전한 성을 추구하면서도 위험한 성에 접근하여 계단을 밟으며 정상에 오르기를 할 수 있다. 성에는 변화를 요구하는 욕망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성 결정은 ‘위험한’ 또는 ‘아름다운’이라는 기준으로 성 계단에서 곡예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의 미학적 표현은 예술이고 탐욕적 표현은 외설이 될 수 있다. 성의 본능적 표현은 생명이고 이성적 표현은 삶이 될 수 있다. 성의 감성적 표현은 사랑이고, 무모한 표현은 욕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은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성은 나의 것이기도 하고 남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성 시대에 생명계의 성은 어떻게 존재해야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사랑이 성을 불러야 하고, 욕망이 성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현재 “도쿄의 성 자유는 어디까지 와있는지?”, “자신의 성 자유는 어디까지 와있는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울퉁불퉁한 감성 시대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익사상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대체 흐름을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는 감성 시대를 느꼈다. 감성 시대를 생각하면서 ‘이성(異性)은 본능의 적자일까 아니면 사생아일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 실체는 춘화의 세계에서 어렴풋이 시작되어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성은 자유이기도 하며 방종이기도 했다. ‘성의 자유는 문명이기에 숭고해지고, 성의 방종은 야만이기에 추해지는 것’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는 행방을 모르는 춘화의 성과 실체를 모르는 자신의 성을 숙제로 남기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