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이야기]
버릇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것이요. 저의 브런치스토리 작가의 서랍에는 쓰다만 글이 수십 개입니다.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글(이 될 수도 있는 글)이 많습니다. 다만 끝까지 완성하지 못해 공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간에 멈춘 글도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느 글쓰기책에선가 마무리를 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납니다. 완성 없이 중간에 흩어질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끝낼 때 끝낼 줄 알아야 한다, 그만 고쳐라, 이런 조언들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완성'이라는 것이 특히 더 어렵습니다. 성격이 그래요.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가 잘 안 됩니다. 이 글도 70% 정도는 점심시간에 카페에 앉아 핸드폰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20분 정도 걸렸어요. 뭐, 대단한 글을 쓴 건 아니지만 참 쉽죠?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의욕이 불탈 때가 있다가 또 갑자기 식습니다. 식고 나면 그때부터가 문제입니다. 완성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글이 완벽하지 않아서 고치고 또 고칩니다. 완벽해질 리가 있을까요? 저는 글쓰기 초보인데요. 쓰레기 같은 글을 써도 마침표를 찍어야 다음 글을 쓰고, 다음 글을 계속 써내야 초보에서 벗어날 텐데요. 완벽주의와의 싸움에서 저는 거의 항상 패배합니다. 이 글에는 과연 마침표가 찍힐까요.
20년이 다 되어가는 의학공부에서는 최근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다 때려치웠다는 건 아니고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일은 계속하는 중이에요. 몇 달 전에 분과전문의시험이라는 걸 마쳤는데 이게 제 기준에서는 커리어의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높은 자격이나 직함을 원하지 않아요. 어떤 의사들은 오히려 이걸 시작이라고 부르더군요. 이제부터 좋은 병원, 큰 병원에 남아서 연구도 열심히 하고 대외활동 활발히 하고 학생들 잘 가르치고 등등, 그렇게 경력을 착실히 쌓고 운이 좋으면 은퇴할 때쯤 되어서는 명의라 불러주고, 성대한 은퇴식을 해줄지도 모르겠어요. 그 길을 걷는 분들에게는 은퇴가 마침표이겠네요. 대한민국 의료에 꼭 필요한 분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야죠. 그렇지만 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저도 연구와 공부를 하긴 합니다. 새로 나온 치료법, 바뀐 가이드라인 등 개인의 차원에서 하는 업데이트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오늘도 저를 믿고 치료받으러 오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시니까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치료만 잘해드리면 좋겠어요. 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치료 잘하는 의사는 지금 상태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요. 대신 저는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작가가 아예 주직업인 것도 좋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의학에 대해서는 마침표를 가장한 쉼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을 계속 하긴 하니까요. 언젠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의 의사가 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고요.
갑자기 무슨 작가냐고요? 제가 읽는걸 아주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당연히 좋아합니다. 대충 헤아려도 1년에 50권 이상은 읽고 있는데, 열심히 읽다 보니 이제는 쓰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쓰고 있는데요, 쓰는 것도 꽤나 할만합니다. 잘한다는 게 아니고 재밌다는 말입니다. 내친김에 브런치 작가도 신청했고 어떻게 운 좋게 통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일종의 반성문 같은 글이에요. 글을 너무 띄엄띄엄 올리고 있어서 다시 잘하겠다고 반성하고 선포하는 거죠. 돌아서서 딴소리하지 못하도록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제 글을 읽는 몇 안 되는 분들에게라도 요. 당분간 글의 마침표 찍기에 박차를 가하려고 합니다. 저는 좋은 작가가 되어보기로 마음먹었거든요.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써야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텐데 너무 적게 쓰고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뭔가를 쓰긴 썼는데 마무리를 하지 못했죠. 안 쓴 것과 마찬가지인 글만 쓴 것 같습니다. 글쓰기 외에도 마침표가 없어 흩어져버린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디프로필, 마라톤 완주, ADP 자격증, 영어공부 등. 끝까지 한 일이 없네요. 이 이야기를 다 풀어서 들려드리면 책 한 권은 되겠어요. 책으로 나온다 한들 하다만 일에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어요? 다들 그렇게 산다고요? 그렇다면 조금 위로를 받습니다.
자, 저는 이제 이 글에 마침표를 찍고 쌓여있는 다른 글들에도 차근차근 마침표를 찍으러 갑니다. 하시는 일들마다 적절한 위치에 마침표가 찍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