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이야기]
가을이 반갑습니다. 바람이 좋습니다. 저녁에는 창문을 연 채로 지내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주전부터 창문을 넘어 불청객이 주기적으로 찾아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나 우리 집 거실에 떡하니 찾아오는 불청객. 담배 냄새입니다. 어떤 자식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이 험해져서 죄송합니다만 담배 냄새 때문에 다시 문을 닫고 지내야 해서 화가 납니다. 신선한 공기를 누릴 당연한 권리를 빼앗기는 것만 같습니다. 어느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창문으로 내다보기도 하고 냄새가 나면 일층으로 달려가 담배 불빛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창문을 열고 크게 소리도 질러 보았으나 기분만 상할 뿐 효과가 없습니다. 여전히 냄새는 올라옵니다. 아내와 상의 끝에 엘리베이터에 호소문을 붙여보기로 합니다.
"내가 내일 출근해서 쉬는 시간에 써볼게."
아래는 제가 쓴 호소문입니다.
<흡연 관련 부탁 말씀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유난히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찾아온 완연한 가을에 몸과 마음이 상쾌했던 10월이었습니다. 모두들 건강히 지내고 계신지 인사를 먼저 드립니다. 어느새 2024년은 11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바람이 좋다 보니 저녁에는 베란다의 문을 열고 지내는 요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몇 주 전부터 오후 8시~9시쯤 베란다를 통해 담배 냄새가 올라오고 있어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집에는 어린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OO아파트에 자녀를 키워보지 않은 분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마는 처음 만난 사랑하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따뜻한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있다 보니 환기도 해야 하고 시원한 바람 쐬는 것을 아이들도 좋아해서 저녁시간에는 베란다 문을 열고 지내는데, 아무래도 베란다에서 흡연을 하시는 가정이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씀을 올립니다.
베란다 문을 열고 피우시는 것인지, 닫고 피우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희가 느끼기에는 베란다 하수구를 통해 담배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하수구가 베란다 창문과 가까이 있다 보니 거실로 냄새가 쉽게 들어옵니다.
흡연을 하기 위해 밖에 나가는 것이 귀찮으신 줄 아오나 저희 가정은 길지 않은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어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부디 저희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가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카톡으로 보내니 아내가 웃습니다. 호소문을 붙이랬더니 에세이를 써왔냐며, 길어서 아무도 안 읽겠다고 합니다. 글쓰기에 취미를 붙이더니 뭘 쓰라고만 하면 난리가 난다며 꾸중을 듣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렇기는 합니다. 에세이까지는 아니어도 담배 좀 피우지 말라는 흔한 내용에 불필요한 힘을 잔뜩 준 느낌입니다. 가을이 어쩌고, 날씨가 저쩌고. 브런치스토리에나 올리겠다고 멋쩍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저 정도로 정성 들인 호소문이 쓰여있다면 담배를 안 피우고 싶을 것 같기는 한데,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담배는 밖에 나가서 피워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