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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y 07. 2024

기억 너머 추억으로



'기억한다고 모두 추억이 되지는 않는다.'


아내가 기어코 환갑을 맞았다. 내 환갑 때, 자신은 맞이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했었는데 별수 없었나 보다. 아내가 돈 걱정 때문에 집에서 애들하고 고기나 구워 먹자고 했다. 저 꼬임에 넘어가면 평생 후회할 일이 생길 것 같아 우격다짐해서 식당을 예약했다. 나와 아들들이 다 가능한 날을 고르다 보니 생일 보다 하루 전에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집 근처에서 괜찮다고 하는 고깃집 중에서 고르고 골랐다. 식사 장소는 모두 만족한 눈치였고, 오랜만에 이야기도 많이 나누게 되어 좋은 분위기였다. 아내가 아들들의 살가운 애정 공세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식사를 마치고 아들들과 헤어진 후, 아내는 차분한 어조로 "살면서 애들하고 좋은 추억은 계룡대 근무할 때 외에는 없는 것 같아." 한다. 그래도 그때는 주말에 애들 데리고 대둔산 자락 개천에 가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를 타박하는 말로 들려 마음이 불편했으나, 좋은 날이라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 기준 안에 있는 애들하고의 수많은 추억은 다 어디로 날려 버리고 기껏 계룡대 추억만 남겨 놓았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아내는 기억의 범위는 넓은 반면, 추억의 기준은 매우 협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 보관되어 있는 기억이 추억이 되려면 가슴으로 내려가야 한다. 가슴으로 내려가는 길목이 좁은 건가?


'기억은 머릿속에 보관되고, 추억은 가슴에 머문다.' 


사전에 나와있는 기억이나 추억의 의미는 유사하다. 과거의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기억에 비해 추억이 특별한 점은 감정이 이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단순히 두뇌 속 데이터베이스에 무작위로 저장된다. 이 기억들 중에서 그리움이나 아쉬움과 같은 마음이 작용되어 선별된 기억만 가슴으로 내려와 추억으로 각인된다. 기억은 경험을 통해 일정한 주기로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추억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춘천 후평동의 낮은 판잣집 사이로 난 골목에서 개구쟁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중에 나는 키가 작았고 후줄근한 바지를 엉덩이에 걸친 채, 흘러내린 코를 주먹으로 연신 문질러대고 있었다. 골목 어귀 광주리에 얼굴이 파묻힌 어머니가 보였다. 가게에서 팔다 남은 국수를 한가득 머리에 이고 "국수 사세요." 하며, 이 골목에 접어든 참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언뜻 어머니인걸 알아채고 쫓아가 치마폭을 잡을라치면, 손사래 치면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곤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한 장면이다. 어려웠던 시절, 학생인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도맡아 동분서주하던 어머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시절을 기억하기 어렵다. 나도 몇 안 되는 기억이 있지만, 이 장면만은 뚜렷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어렸지만 혼자 바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추억으로 각인된 것 같다. 이렇듯 항상 좋은 기억만 추억이 되진 않는다. 그리운 것, 돌이켜 보고 싶은 것, 안타까운 순간,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모두가 추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픈 추억, 슬픈 추억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기억들이 숙성과정을 거쳐 추억이 되고, 이것들이 쌓이면 나만의 인생 스토리가 된다.  


'인생의 후반기, 추억 쌓기가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아직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과거도 추억으로 바뀔 수 있다. 기억에 남아있는 그때의 느낌을 새록새록 되새겨 보다 보면, 뒤늦게라도 소중함과 그리움을 알아가게 되며 추억으로 가슴에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힘들었던 기억은 오늘의 고통을 이겨내는 버팀목이 되고, 그만큼 인생에 있어 행복 자양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매일 새로운 기억들이 머릿속에 쌓여간다. 이 순간순간의 기억들 중에 무엇이 추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많은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행복해진다.


하루 걸러 쉬는 날,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아내와 나는 작은 배낭에 커피와 주전부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간다. 서울 근처에 괜찮다고 하는 둘레길, 산책길, 천변로, 공원길은 거의 섭렵했을 거다. 아내와 둘이 다니면 당연히 둘 만이 교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살아가는데 찌들어 서로 목청 높이고 짜증 낸 많은 일들이 점점 그리운 흑백사진처럼 변해가는 걸 느끼곤 한다. 올해 104세로 백 년을 넘게 살아온 김형석 교수가 인생의 황금기를 60세에서 75세 사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과거의 씁쓸한 기억들을 하나씩 추억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환갑 식사 때, 아들이 사준 꽃을 안고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찍힌 아내의 사진은 단연 갑이었다. 이제까지 찍힌 괜찮다는 것들을 볼품없이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시간의 기억은 곧바로 추억되어 가슴에 새겨졌다. '순간의 소중함은 그것이 추억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라고 한다. 아내와 아들들과 그리고 친구들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많이 만들고, 그것을 숙성시켜 추억으로 간직해 나가는 삶을 살고 싶다. 추억은 모두 다르고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뿐이라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절박함을 가져야 한다. 며칠 전 과천대공원 둘레길의 산림욕장에 앉아 아내와 이야기 나누던 장면은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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