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라도

태국, 방콕

by 에트바스

여름이 되면 우리는 더 뜨거운 나라로 떠나곤 했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던 겨울날, 팀원들과 겨울에 살갗을 태워오는 것이 부의 상징이라며, 겨울의 휴양지 여행이 진정한 휴가라고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물론, 그 애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보통의 회사원’에게 일 년 중 가장 쉽게, 어쩌면 유일하게 쉬어갈 수 있는 며칠이란, 여름휴가가 전부 아니던가. 우리는 '여름휴가'와 아주 잘 어울리는 뜨거운 7월의 마지막 주, 주말을 앞뒤로 꼼꼼하게 붙이고서야 열흘간의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휴가지를 고르다가 끈적이는 여름이 지루할 즈음이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남반구에 눈길을 돌려보기도 했다. 금세 눈길을 거둘 수밖에 없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그 정도의 비행기 값이라면 내년에 또 한 번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결론지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동하는데 하루를 몽땅 써버려야 하는 거리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우리의 여름 여행은, 자주 싸고 가까운 동남아시아를 향했다. 한국은 때때로 시베리아보다 추운 겨울을, 동남아보다 뜨거운 여름을 가진다는 말들이 종종 위로처럼 들렸다. 더우면 어떻고 추우면 어떤가. 아스팔드가 이글거리는 일상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괜찮다. 여행이라는 말 한마디 만으로도, 여름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라도 좋았다.









이번 여행은 '태라홍'이다. 여행을 계획하며 만든 폴더 이름인데, 태국, 라오스, 홍콩의 줄임말이다. 그건 여행이 끝나면 사진이 가득 담길 폴더이기도 했다. 이 여행은 카오산로드를 향해 시작되었다. 쉬는 날이면 일상을 피해 단골 커피 가게에 수도 없이 드나들며, 박준의 <온 더 로드 On the Road>를 탐독하곤 했다. 저자가 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장기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나는 책을 펼칠 때마다,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한 동경을 싹틔웠다.


* 카오산로드 : 태국 방콕의 여행자 거리. 세계 여행자들의 성지라고 불린다.


얼마 후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카오산로드가 등장했다. 그들은 모두 카오산 로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한 번 도 가보지 않은 카오산 로드를 예찬하며 미륵산을 올랐다. 그렇게 카오산로드가 잊힐 무렵, 또 다른 여행길에서 우연히 그 애를 만났다. 그 애 역시 카오산로드를 알고 있댔다. 얼마 안 가 그 애는 여름휴가로 태국 여행을 제안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예스를 외쳤다. 그렇게 몇 번이나 카오산로드를 마음으로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카오산로드로 떠나게 된 것이다.








한국을 출발해 방콕, 푸껫, 우돈타니, 라오스의 방비엥, 비엔티엔 그리고 홍콩까지 경유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9박 10일 여정. 그 첫 체류지는 카오산 로드였다. 새벽 1시쯤 방콕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 애와 나는 공통점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낯선 도시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하지만 한밤중,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택시 안에서 마음 놓고 태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택시기사가 트렁크에 배낭을 실으라는 제스처를 보이자, 번뜩 혹시 우리 배낭을 훔쳐 달아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얼마 전, 친구가 마닐라의 소매치기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걔 친구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소매치기가 목걸이를 확 채갔데”

“정말?”

“응. 목에 걸고 있는 걸 가져갔다니까? 무섭지?”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나눌수록 더 긴장을 늦출 수가 없게 되었다. 카오산로드로 향하고 있는지 창밖을 살폈다. 매고 있던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였다. 여름이지만 어쩐지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수많은 사원들을 지나, 한 시간쯤 달렸을까. 우리가 막 잠들려는 찰나였다. 택시기사는 인적이 드문 골목에 우릴 내려주며 이곳이 카오산로드라고 했다. 여행자들의 성지라더니, 밖은 여전히 까맣고 조용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렸다. 배낭을 다 챙겨 멘 다음 택시비를 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어떤 거리 길래 그토록 많은 여행자들이 머무는 걸까.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걷자, 자신의 몸통보다 더 큼직한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곳의 여행자들에게 밤의 고요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였다. 질세라 우리도 맥주를 찾아 나섰다. 배낭이 무거운 것도, 흠뻑 땀에 젖은 것도 잊은 채였다. 거리에는 팟타이(태국식 볶음면)와 카오팟(볶음밥)을 파는 노점상이 가득했다. 태국산 맥주를 한 병 손에 쥐고, 한국돈으로 천원이 조금 넘는 팟타이를 한 접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맥도널드가 보였다. 로널드와 함께, 두 손을 모으고 “컵쿤 캅”을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신나게 웃어댔다. 그 밤은 누구라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카오산로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었다. 뒷골목 마사지샵에서 두 시간쯤 눈을 붙이고 나자 어느새 떠날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푸껫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채 몇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여행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로 가득 찬 그 정신없는 거리를 뒤로하고, 다시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 로널드는 맥도널드의 캐릭터 중 하나다. 태국의 로널드는 모두 두 손을 모은 모습을 하고 있다.

*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카오산로드로 향하던 택시 기사에게 퍽 미안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