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지만 기준은 없다
ASAP(as soon as possible)는 빠르게 해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회사에서 ASAP는 속도를 뜻하지 않는다.
ASAP는 책임을 재촉하는 말이다. 그날 오후, 메일 내용은 이랬다.
[긴급] ASAP 반영 요청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후인은 늘 같은 번역을 한다.
“오늘 중으로 = 오늘 밤까지.”
“가능하면 = 불가능하면 네가 문제.”
“긴급 = 내가 결정 못 했으니 네가 뛰어.”
후인은 일을 열었다. 그런데 기준이 없었다. 방향도 없었고, 승인자도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어느 톤으로 갈까요? 강하게/완화?”
돌아온 답은 늘 같은 형태다.
“그걸 꼭 얘기해야 알아? 너가 적당히.”
적당히는 회사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다. 적당히는 기준이 아니라 결과 평가의 권한을 상대에게 남긴다.
그러면 실무자는 이렇게 된다. 기준 없는 속도로 달리고, 나중에 기준 있는 비판으로 맞는다.
후인은 그 구조를 너무 많이 겪었다. 그래서 ASAP를 받으면, 먼저 속도를 늦추는 문장을 붙이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문장이다.
“ASAP 처리 가능합니다. 다만 기준(A/B) 확정 후 진행해야 재작업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처리 범위는 A까지 가능합니다. B까지 원하시면 우선순위 조정이 필요합니다.”
“긴급 건이라면 승인자/결정 항목을 먼저 지정 부탁드립니다.”
“속도/품질/범위 중 우선순위 선택 부탁드립니다. 선택에 따라 산출물이 달라집니다.”
“1차본은 오늘 공유 가능, 확정본은 내일 오전이 안전합니다. 어떤 형태를 원하실까요?”
“기준이 불명확해 재작업 리스크가 큽니다. 10분만 방향 확정 후 착수하겠습니다.”
“ASAP 처리 시 리스크는 C입니다. 감수 가능 여부 확인 부탁드립니다.”
“회신 없으면 A로 진행하겠습니다(추후 변경 시 범위 변경으로 관리).”
“요청사항을 문장으로 정리해 주시면, 그 문장을 기준으로 반영하겠습니다.”
ASAP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다.
결정을 안 한 사람이 속도를 요구하면, 속도를 낸 사람이 책임을 뒤집어쓴다.
후인은 이제 ASAP를 보면, 먼저 묻는다
.
“무엇을 급하게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누가 결정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