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다가 갑자기 든 생각
나는 동물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어렸을 때 한 번인가 가봤었는데 그때 동물들의 신기함보다 저 아이들은 왜 저기에 갇혀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때부터 동물원보다 <동물의 왕국>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다, SBS <이상한 동물원>을 보며 또 삐딱함이 돋아났다.
'애초에 저럴 거면 왜 저 아이들을 가둬두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이 '인간의 오만함'까지 이어졌다.
인간은 동물원을 왜 만들었을까? 생명을 가둬두고 전시한다는 건, 결국 인간이 승리자라는 선언일까?
무언가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기만행위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문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문명(文明)이라는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은 글자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근대의 문명은 '기록 가능한 세계'를 전제로 삼는다. 여기서 말하는 문명은 최소한 근대적 문명, 즉 기록과 분류, 표준화를 통해 세계를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체계를 뜻한다.
글자라는 객관적인 상징은 특히 다른 개체보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증거처럼 기능해 왔다. 기록은 기억보다 오래가고, 문자는 말보다 멀리 간다. 우리는 글자를 통해 세계를 고정했고, 고정된 세계 위에서 규칙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글자가 없다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단지 인간이 글자라는 기호로 언어를 문자화했을 뿐, 동물들에게도 언어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들도 무리를 이루고 교류하고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언어는 사전으로 정리되지 않았고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뿐이다. 사실은 우리가 읽지 못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야생을 우리 안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동물원은 '동물을 보호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보호'는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의미이다. 어떤 대상은 스스로 보호를 요청할 수 있지만,
어떤 대상은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논리로 끌려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동물원의 동물은 어디에 놓일까? 동물들이 보호를 요청해서 동물원에 들어왔을 리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수동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보호는 종종 '통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보호는 언제나 선한 말처럼 들리지만, 보호를 선언하는 순간 결정권은 보호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인간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동물을 가두면서 공간을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누가 위험한지, 누가 보호받아야 하는지, 누가 관찰될 가치가 있는지, 누가 '관리 가능한 생명'인지 정의까지 통제한다.
그래서 동물원은 하나의 선언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살릴 수도, 멈출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자연을 규칙 안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선언들은 교육, 연구, 보존, 구조 등 따뜻한 말로 포장된다. 실제로 많은 동물원은 구조된 개체를 치료하고, 갈 곳 없는 생명을 떠안고, 멸종위기종 보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문제는 그 선의와 기능이 동물원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로 작동할 때 생긴다.
선의는 가장 고급스러운 면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 이 공간은 정당하다"
그 순간 가두는 방식이 적절한지, 전시가 필요한지, 인간이 이 일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 그 고통의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 같은 질문들은 멈추고 '좋은 일'이라는 한 문장 아래에 조용히 눌린다.
"왜 야생을 우리 안에 넣었을까?"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면 결국 우리는 야생이 아니라 인간을 보게 된다. 야생을 가둔 공간이 어쩌면 인간 스스로를 어떻게 정당화해 왔는지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화는 흔히 "더 나아짐"처럼 들리지만, 문명화의 핵심에는 분류가 있다.
무엇이 인간다운가? 무엇이 위험한가? 무엇이 관리 가능한가? 무엇이 보여줄 만한가?
글자를 통해 쌓아 올려진 문명화는 이 분류를 가능하게 했고, 그 분류는 곧바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구분은 누군가를 사회 안에 넣고 밖으로 밀어내는지에 대한 배치의 기술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시'는 종종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위에서 작동해 왔다. 그래서 '인간답지 않은' 무엇이든 전시가 가능했다. '비정상'을 보여줌으로써 '정상'이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원은 정상적인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생명을 안전한 거리로 옮겨놓고 통제하는 수단으로도 기능했을 것이다.
미셸푸코(1995)는 근대 권력이 사람을 다루는 핵심 기제로 '규율(discipline)'과 '정상화(normalization)'를 말한다. 그리고 그 정상화가 단순한 진단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감각이라고 못 박는다.
“The judges of normality are present everywhere. We are in the society of the teacher-judge, the doctor-judge, the educator-judge, the ‘social worker’-judge; it is on them that the universal reign of the normative is based; and each individual, wherever he may find himself, subjects to it his body, his gestures, his behaviour, his aptitudes, his achievements.”
—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Vintage Books, 1995, p.304.
이 문장 하나로 정상과 비정상은 “발견”이 아니라 "판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판정은 곧 개입이다.
문명화는 그 판정을 '상식'의 얼굴로 유통시킨다. 정상을 세우고 정상에서 벗어나면 교정한다. 교정이 안 되면 격리한다. 격리된 것을 공개하면, 전시가 된다.
문명화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안전을 위한 거야.” “이건 보호야.”
그런데 그 보호가 굴러가는 구조를 보면, 결국 핵심은 통제 가능성이다.
문명화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애매한 것, 경계가 흐려지는 것, 분류가 안 되는 것, 예측이 안 되는 것과 같은 '통제 불가능성'이다. 문명화는 그런 것들을 견디는 방식이 아니라 분류해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문명화는 늘 다음과 같은 기술이 동반된다.
이름 붙이기: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관리할 수 있다.
분류하기: 분류되지 않으면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경계 세우기: 경계 밖은 예외가 되고, 예외는 통제 대상이 된다.
기록하기: 기록은 책임과 처벌과 정당화를 낳는다.
이 과정은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 하지만 다른 말로 번역하면, 이건 세계의 관리 가능화다. 문명은 세계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정리”한다. 정리된 세계에서 인간은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 편안함이 곧 문명화의 성과처럼 제시된다.
문명화 사회에서의 전시는 단지 보여주는 행위가 아니라, 기준을 공개하는 행위다.
전시는 말없이 이렇게 선언한다.
이것은 안에 있어도 되는 것
이것은 밖에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은 관리 가능한 것
이것은 관리 불가능해서 격리된 것
그리고 전시의 핵심은 언제나 하나다.
“우리는 이걸 다룰 수 있다.”
이때 전시는 “호기심”을 빌려오지만, 실제로는 “질서”를 보여준다. 전시되는 대상은 스스로를 설명할 권리가 거의 없다. 설명은 대개 관리자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말할 수 있는 자가 세계의 기준을 쥐는 것. 그게 문명화의 특징이다.
이와 같은 분류와 정상화가 일상에서 작동하려면, 그 기준을 집행할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제도와 국가로 집중되는 순간, 문명은 '폭력의 감소'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폭력의 재배치'를 시작할 수 있다.
엘리아스(2000)는 문명화가 폭력이 사라진 역사가 아니라, 폭력과 강제의 행사가 개인과 가문, 지역의 분산된 손에서 '중앙권력의 독점'으로 이동한 역사로 보았다.
“the territorial property of one warrior family, its control of certain lands and claims to tithes or services of various kinds from the people living on this land, was transformed with the advancing division of functions and in the course of numerous struggles, into a centralised control of military power and of regular duties or taxes over a far larger area.”
— Elias, The Civilizing Process, Basil Blackwell, 2000, p.361.
그리고 폭력은 덜 쓰이게 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군사력과 과세권을 결합해 폭력의 사용을 제도화·전문화하면서 더 절차적이고 더 합법적인 방식으로 재배치된다고 보았다.
“again and again it was the military power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the central authority which secured and increased his control of taxes, and it was this concentrated control of taxes which made possible an ever-stronger concentration of military and political power.”
— Elias, The Civilizing Process, Basil Blackwell, 2000, p.355.
문명은 폭력 대신 규칙을 썼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규칙이 닿지 않는 생명 앞에서, 문명은 자주 다시 격리와 전시를 선택한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가 보여준 건, 인간이 폭력을 없앤 게 아니라 폭력을 국가와 제도로 위탁했다는 사실이다. 즉, 문명화는 폭력의 소멸이 아니라 더 안전하고, 더 절차적이고, 더 “합법적인” 형태로 폭력을 재배치한다. 그래서 문명화의 모순은 여기서 터진다.
보호는 선(善)처럼 들린다. 하지만 보호는 곧 관리의 언어를 부른다.
관리는 절차를 부른다.
절차는 기록과 평가를 부른다.
기록과 평가는 다시 통제를 정당화한다.
문명은 “우리는 살린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러니 우리가 결정한다”는 권리를 함께 가져간다.
존 버거(1980)는 동물원을 “동물을 만나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념물”이라고 쓴다
“The zoo to which people go to meet animals, to observe them, to see them, is, in fact, a monument to the impossibility of such encounters.”
— Berger, John. “Why Look at Animals?” About Looking. New York: Vintage Books, 1980, p. 21.
이 문장을 문명화 비판으로 옮기면 문명은 자연을 가까이 두는 게 아니라, 자연을 무력화한 채로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문명화된 인간의 욕망임을 알 수 있다. 가까이 보고 싶지만 위험하면 안 된다는 식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명은 세계를 계속 “전시 가능한 형태”로 바꿔왔다.
사전적 의미의 문명화는 "물질적, 기술적, 사회 조직적 발전 상태가 높은 수준이 되다"의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높은 수준'이다. 무엇이 어떻게 높은 수준이 되고,
그 전의 낮은 수준은 무엇이었을까?
문명화는 더 선해진 과정이 아니라 자기 통제를 내면화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기준이 판정된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어떤 것을 '보호'라 말하면서 '통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전시라는 기준을 공개하며 '인간이 비정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한다.
여기서 '기준'은 단지 규칙이 아니라 무엇을 정상으로 만들고 무엇을 예외로 밀어낼지를 결정하는 언어와 제도의 묶음이다. 그래서 결국 문명화란 폭력을 세련된 형태 즉 '높은 수준'으로 바꿔온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우리는 '정복'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질병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한다. 그런데 정복의 사전적 의미는 "무력으로 쳐서 정벌하여 복종을 하게 함"이다. 문명은 늘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지만, 그 진보가 서 있는 바닥에는 언제나 하나의 확신이 있다.
"기준"
그리고 그 확신이 강해질수록 기준 밖의 대상은 더 쉽게 설명되고, 교정되고, 격리되고, 전시된다.
그래서 문명에 대한 비판은 불편하다. 문명화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 성과가 어떤 비용 위에 세워졌는지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