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불편해하는가
집단 규범과 이탈자에 대한 인지적 거부
조직 안에는 늘 말로 쓰이지 않은 규칙이 있다. 취업규칙에도 없고, 매뉴얼에도 없고, 누구도 명시적으로 설명해준 적 없는데 이상하게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 회의할 때는 어느 정도 표정을 맞춰야 하고, 회식에서는 어느 타이밍에 웃어줘야 하고, 퇴근할 때는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식의 규칙들이다. 이런 것들은 법도 아니고 원칙도 아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꽤 강하게 작동한다. 문제는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늘 정시에 퇴근한다고 해보자. 일을 대충 하는 것도 아니고, 맡은 일을 제대로 끝내고, 규정대로 퇴근할 뿐이다. 사실만 놓고 보면 아무 잘못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 공기가 미묘해진다.
누군가는 “참 칼같네”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눈치가 좀 없다”고 한다. 왜일까. 정말 그 사람이 문제여서일까.
무자퍼 셰리프는 집단이 상호작용 속에서 행동의 기준, 즉 규범을 만들어내고 그 규범이 구성원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사람의 행동이 개인의 취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단이 어떤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지가 곧 개인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이탈자는 불편하다.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건 꽤 중요한 문제다. 집단 속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완전히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다만 모두가 비슷하게 하고 있으니 그것을 정상이라고 받아들이고 버틸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틀 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숨겨두었던 질문이 떠오른다. ‘저렇게 해도 되는 거였나?’ 바로 이 질문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 사람의 행동이 틀려서가 아니라, 우리의 순응이 필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단은 종종 이탈자를 평가절하한다. 그를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예의 없는 사람이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부른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틀린 사람이어야만, 지금까지 내가 감수해온 순응도 정당화된다. 만약 그가 맞는 사람이라면, 내가 참아온 것과 포기해온 것들이 갑자기 불필요한 희생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 모임에서 꼭 해야 하는 역할을 거부하는 사람, 연애 관계에서 정해진 감정 표현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 조직 문화에 무난히 스며들지 않는 사람은 자주 “좀 유별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유별난 건 어쩌면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집단 규범일 수도 있다.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불편해하는 건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다. 그건 집단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순간에 대한 반응이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야 안심되는 구조 안에서, 다른 리듬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면 집단은 즉각 긴장한다. 규범이란 그렇게 작동한다. 다수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옳은 것처럼 보이고, 그 밖의 선택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결국 우리가 불편해하는 건 차이 그 자체가 아니다. 차이가 보여주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증거를 볼 때, 이상하게도 자유보다 불안을 먼저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