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09_정릉 큰아버지

혼자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구슬픈 노래라도 부르면서 울었으면 싶었다

by 김홍성

화가 김 00은 우리 어머니의 큰 오라버니, 즉 나의 외숙이다.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분을 큰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였기에 우리는 어릴 때부터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내가 부모 슬하를 떠나 서울 유학을 오면서 큰아버지 내외에게 맡겨지던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큰아버지 내외는 슬하에 1남 4녀를 차례로 두고 L 자로 꺾어진 아담한 개량 한옥에 살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두 평 남짓한 마당을 밟게 되고, 마당 왼쪽이 문간방이며 문간방에서 부엌이 이어졌고, 부엌에서 안방으로 소반 하나 정도는 들어갈 작은 문이 있었다. 안방 옆의 마루방은 마당과 대문을 향했는데 마루방 오른쪽이 건넌방이었다. 건넌방은 누이 넷이 같이 썼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옛날 개량 한옥이 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엌문 앞만 빼고 좁은 툇마루가 죽 이어져 있었다. 툇마루 밑에는 연탄 넣는 아궁이가 있었다. 대문 오른쪽에는 블록을 쌓고 시멘트로 미장한 장독대를 겸한 반 지하 광이 있었다. 겨울에는 광에 김치나 염장무가 저장되었다. 변소는 마당에서 장독대 겸 지하 광과 건넌방 사이로 난 좁고 짧은 통로 끝에 있었는데, 비교적 넓었고 조그만 환기창이 있었다. 이 집이 몇 평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당까지 합쳐서 얼추 30평은 되지 않았나 싶다.

뒷마당이 있었던 것을 잊을 뻔했다. 앞마당에 비해 길쭉하고 좁은 뒷마당의 텃밭에는 상추 등 몇 가지 채소를 심었다. 나는 형이 혼자 쓰던 문간방을 같이 썼다. 형은 내가 4학년 때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생물반 특별활동을 하고 있어서 책상 위나 서랍 속에 신기한 곤충이나 도마뱀 같은 것을 간수하고 있었다. 서랍 속에 있는 조그만 성냥갑 속에는 풍뎅이가, 소풍 가서 샀을 법한 향나무 필통 속에는 도마뱀이 들어 있었다. 형이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았을 때 나는 서랍을 뒤져 형의 수집품들을 구경했다.

형이 서랍 깊숙하게 숨겨둔 괴도 루팡 같은 탐정 소설을 몰래 읽기도 했는데 책갈피에서 형의 메모 쪽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 메모에는 형 나름대로 구상했던 탐정 소설의 등장인물 이름과 캐릭터가 나왔다. 그중에는 여동생들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는 정도를 아직 기억한다.

나중에 형이 고등학교에 간 후에 훔쳐본 형의 일기장에는 통학하는 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여학생에 대한 야릇한 상상도 나온다.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은 ‘소녀가 달려와 내 가슴에 포근히 안겼다.’이다.

큰아버지 슬하의 네 자매 중에 둘은 누나들이었다. 당시 큰누나는 중학교 2학년, 그리고 내가 그냥 이름을 불렀던 작은 누나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인 5학년이었다. 나보다 동생인 두 자매는 두 학년씩 아래였다. 나는 2남 2녀의 장남인데, 내 아우 ㅇ수와 ㅇ혜가 같은 학년, 내 여동생 ㅇ주와 ㅇ아가 같은 학년이었다.

처음 혜화동으로 통학할 때는 중학교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큰누나와 함께 합승을 타고 돈암동 전차 종점에 가서 내린 후 나만 전차로 갈아탔다. 학교 갈 시간이 되면 대문 앞에 책가방을 들고 서서 방긋 웃던 누나의 단발머리 아래로 설원처럼 펼쳐진 하얀 옷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작은누나에 대한 그 당시 기억은 별로 없지만 네 자매 중에 유독 그 누나가 형과 친했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셋째 딸 0혜와는 한 번 크게 싸운 일이 있다. 집을 등진 쪽의 골목을 벗어나면 제법 큰 개울이 나오는데 거기서 같이 잡은 올챙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내가 먼저 화를 냈다. 나는 0혜가 들고 있는 올챙이 담은 비닐봉지를 잡아채서 시멘트 바닥에 쏟아 놓고 발로 문질러 버렸다.

0혜는 그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나를 향해 ‘너네 집 가, 너네 집 가’하면서 울부짖었다.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비록 초등학교 때 일이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0혜는 그것 말고도 내가 미웠던 기억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막내인 0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올챙이 사건 때 셋째 언니 0혜 옆에서 같이 울었던 것 같다.

0아는 현재 외국에 산다. 부음을 듣고 바로 비행기를 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상면은 못했다. 나는 부음을 듣고 바로 상경하여 문상했다. 엎드려 절하는데 이 못된 조카는 울음이 안 나왔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변한 당시 67세의 상주, 그러니까 형과 함께 소주를 몇 잔 마신 후에는 혼자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구슬픈 노래라도 부르면서 울었으면 싶었다.

정릉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던 60여 년 전(1963년 무렵)의 식구들은 상다리를 접는 둥그런 밥상을 썼는데 가끔은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기도 했다. 집에서 출발하는 시간이 제각기 달라진 후에는 한둘씩 밥상에서 빠지는 아이들이 있었고,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싸갔으므로 주로 저녁이나 일요일에 그렇게 둘러앉았던 것 같다.

어느 일요일 점심에는 뒷마당의 상추를 내가 뜯었던 기억이 있다. 큰어머니, 그러니까 외숙모는 멸치를 으깨어서 고추장 된장과 함께 배합하여 상추쌈에 얹을 양념장을 만들었다. 가지가 나오는 철에 먹는 함흥식 가지찜에도 같은 양념이 들어갔다. 봄에는 찬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겨울 한 철 독에서 숙성한 염장무를 얹어 먹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점심에 정릉 집 마당에서 수제비를 만들던 기억이 난다. 마당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솥을 올린 후 끓는 물속에 멸치를 가득 넣은 양철 육수통을 넣고 육수를 내면서 툇마루에 앉은 누이들이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던 기억이다. 좀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 반죽에 손을 댔는데, 누군가 내 손을 '탁' 쳐서 물리치다가 반죽 그릇이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반죽이 흙바닥에 굴렀다. 이런 일은 사실 그 당시의 보통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큰아버지는 특히 밥상에서 근엄했다. 우선 소리 나게 먹는 것을 금했다.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는 물론 먹으면서 쩝쩝거리는 것도 일일이 지적했다. 밥을 밥그릇째로 엎어서 국에 말 때마다 꾸중을 들었다. 물론 나도 부모 밑에 살면서 얼추 교육받은 바 있지만 큰아버지의 엄한 기준에는 늘 미달이었다.

밥 먹으러 들어오면서 방문을 여닫을 때도 다소곳해야만 했다. 배고프다고 문을 확 열고 들어와서 탁 소리 나게 닫으면 꾸중을 들었다. 큰아버지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거기에 적응되어 있었으므로 밥 먹을 때 꾸중 들을 일은 별로 없었다. 꾸중을 듣는 아이는 주로 나였다.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는 조심조심 수저질하면서 밥을 먹었다. 심지어 서러워서 눈물이 날 때도 눈물과 함께 밥을 씹어 삼켰다.

그렇더라도 밥상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게 되는 아이는 항상 나였다. 내 어머니는 집안에서 하는 일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자식 넷에게 밥을 먹일 때 항상 누가 빨리 먹는지에 대한 내기를 걸었다. 그때 제일 먼저 먹고 숟갈을 놓는 자식을 향해 ‘일등’하면서 박수를 쳐 주었다. 대체로 내가 일등이었다. 나는 밥을 씹지 않고 삼켜도 소화가 잘되는 특이 체질이었다.

어머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외가의 어머니 형제들은 밥을 얼마나 먹었는가에 따라서 변 보는 횟수가 달랐다. 조금이라도 먹으면 한 번, 적당히 먹어도 두 번, 많이 먹으면 세 번도 갔다는 것이다. 815 해방 훨씬 전의 함흥 시절, 그러니까 아직 소년이었던 큰아버지가 당신의 집안 어른 중 누군가에게 거의 매일 굶다시피 한다고 했더니 그 어른은 하루에 몇 번 변을 보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최소한 한 번은 매일 본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그 어른은 ‘그러면 잘 먹는 거다’라고 하는 얘기를 어머니가 옆에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또 외가 형제들 중의 몇몇은 밥을 먹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곧장 변소깐(어머니는 변소를 곧잘 이렇게 불렀다)으로 가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변소깐이 하나뿐인 정릉의 그 집에서 큰아버지와 내가 바로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밥을 빨리 먹는 선수인 내가 변소에 가서 앉아 있을 때 큰아버지가 밖에서 서성거리는 걸 알고도 끝을 보겠다고 버틸 수는 없었다. 학교 가서 나머지를 마저 볼 셈 치고 바로 나왔다.

하루는 금방 끝을 낼 것 같아서 잠시 시간을 끌다 나왔는데 큰아버지가 변소깐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나를 불러 ‘너는 어떻게 밥을 그렇게 빨리 먹고, 게다가 먹자마자 변소깐으로 달려가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그때는 무척 억울했지만, 내가 쉰 살쯤 되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애 때 직접 들었다는 저 얘기 끝에 이르러서는 ‘핏줄이란 과연 징하긴 징하구나’ 싶어서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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