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모순
을 읽으면서 먹을걸 편의점에서 찾다가 이 우동을 사 왔다. 집에 있는 맛없는 싸구려 와인을 해치우기에 딱이라는 생각에 집어 들고 왔다. 토끼정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 중 하나이기에 눈길이 가기도 했다. 맛은 기대와 달리 별로였다. 퉁퉁 불고 차갑게 식은 우동면, 꾸덕을 기대했지만 끈적한 크림, 내가 먹는 게 감자인지 모래뭉치인지 모를 고로케. 하지만 아주 맛없지도 않았다. 애매하게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와인은 더럽게 맛없었다. 그치만 우동은 계속 먹게 됐다. 은은한 카레의 풍미 덕분인지 괴승 망측한 식감의 우동면을 계속 먹게 되었다.
난 항상 별로인 음식을 잘 먹는다. 별로라는 수식어에 딱히 영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최고나 최악이 아니라서 그냥 무던하게 먹는 느낌이다. 최고나 최악은 나에게 너무 자극적이라 온전히 내 감정을 그 음식에 쏟아내게 되지만 별로인 것은 내 배를 채워주면서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그냥 열량과 포만감만 부여하고 떠나는 존재라는 느낌이 좋은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늘 별로인 것을 찾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거에 시큰둥한 것도 아니다. 그치만 오늘처럼 예상 못한 "별로"에 놀라거나 젓가락을 내려놓는 일은 없다.
모순을 읽을 때도 그랬다. 적당히 별로인 환경이 오히려 책에 집중하게 해 주었다. 집에서 편하고 조용하게 책을 읽으면 온갖 생각들 (예를 들면 이 글도 모순을 읽는 동안 떠올라서 책에 도통 집중이 안 되는 바람에 여기에 적었던 글이다)로 가득 차는데, 산만하고 덜컹거리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는 책에 온전히 집중해서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 동대문역을 서있는지도 모른 채 -심지어 한 정거장 넘어설 때까지- 책에 빠져들곤 했다. 적당히 별로인 것은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다. 백색소음처럼 편안하다. 조용할 땐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중구난방이 되어버리는데 마치 적당히 별로인 자극이 그런 것들을 눌러주는 것 같다.
모순을 다 읽고 매우 우울해졌다. 나에게 있어 별로 좋은 책은 아니었다. 주인공의 불행한 가정생활과 행복해 보이는 이모의 가정생활의 대비, 결혼적령기 여자 그리고 가정폭력 미화(내가 느끼기엔 미화였다) 등이 대략적인 내용이다. 뜬금없이 난무하는 감성글귀들은 주제나 내용에 상관없이 감성충들이 좋아하기 딱인 듯했다. 뭐, 그게 나쁘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내게 너무 힘겨워서 숨을 고르고 책을 덮었다 폈다를 반복하게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좀 괴로운 묘사였다.
특히 이 책에서 내 심기를 건드리는 문구 한 가지가 있었다. 행복에는 불행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삶의 부피를 늘려주는 건 불행이라고 했다. 불행을 맛보지 못한 이모의 딸 주리와 불행을 잔뜩 겪은 주인공 진진이 나오는데 진진은 그런 식으로 주리에게 말한다. 읽는 내내 정말 자기 합리화 가득한 표현 아닌가? 하며 심술이 났다. 행복한 사람에 대한 자격지심, 잘난 게 너무 없어서 불행을 겪은 것을 자랑하는 태도. 이 책에서 그런 식으로 불행을 묘사하는 것이 왜 그리도 불쾌하고 싫었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그래서 모순이라는 제목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순이라는 핑계로 이 문장을 변명하는 걸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불행은 겪지 말아야 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잖아.. 나는 차라리 내가 주리처럼 온실 속 화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고난이 닥쳐도 회복탄력성부터가 다르다. 날 때부터 불행했던 사람은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가랑이 찢어져라 쫓아도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불평등한 거다. 근데 불행이 필요하다고? 가당치도 않은 위로라 화만 났다.
아마 모순을 완독 하기 전날 나와 엄마 사이가 나쁜 걸 아는 어른을 만난 일때문에 이 책에 괜한 화풀이를 한걸지도 모른다. 그 어른은 자꾸 나에게 엄마를 돌봐라 엄마를 도와줘라 시답잖은 충고를 해댔다. 20대 중반이 사지멀쩡한 40 후반 엄마를 돌본다는 게 말이나 되나. 조용히 있었는데 열받아서 엄마가 나에게 잘못한 게 많아서 나는 엄마랑 잘 지낼 마음이 없다고 했다. 엄마랑 싸우지도 않고 고민을 얘기하지도 않고 우리 사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엄마에게 다정해지면 엄마랑 동생 사이가 나빠진다고 했다. 뭐 그걸 의식해서는 아니다. 어차피 난 엄마를 싫어하고 동생을 좋아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할 뿐. 그리곤 나는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화제로 돌렸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인간들이 왜 이리 많지? 시답잖은 충고. 본인은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본인은 화목한 모자지간인 거 내가 다 아는데, 뭘 이해한다고 충고하는 건지?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고. 이때부터 나는 타인에게 극도로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무관심할 정도로 그 사람이 겪은 일에 어떤 말도 얹지 않는 사람. 나는 절대 타인에게 이런 상처 주지 않을 거야.
그 어른처럼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줬을까? 아주 어릴 때부터 알든 모르든 고의든 아니든 무수한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입혔겠지. 무서운 건 내 어떤 행동이 상처 줬을지 모른다는 것과 알았던 것도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내 양심의 심판관인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벌은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쳐넣는 것인데, 도통 기억나지 않으니 죄책감도 안 든단 말야. 쩝. 그래서 딱히 우울하진 않은데 찝찝해. 아무 감정 없이 떳떳한 내가 비겁해. 그래서 그냥 기분이 좀 별로다. 그마저도 좀 지나면 대가리 꽃밭돼서 또 잊어버린다.
망각.
별로다, 이건 적당히 별로가 아니라 아주 별로다.
더럽게 맛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