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있으면 짜증 나고 멀리 있으면 걱정되는 엄마와 딸의 관계.
왜 그러는 걸까?
엄마는 그 시대 어머니들처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빠를 믿고 사는 것보다는 오빠를 믿고, 오빠의 미래에 투자를 하셨다.
'저 자식이 내 고생을 다 털어줄 거야.'
생각은 믿음으로 번졌고, 신앙처럼 따르게 됐다.
그러다 보니 아들에게 훈육도 못하고 아들이 하는 일에 일절 반대를 할 수가 없었고, 아들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밀어줬다.
아들은 어느새 집안의 가장처럼 굴었고, 밑에 동생들은 말 한마디, 대꾸도 못하게 했다.
그건 엄마의 선택이였다.
결정의 시간에는 남편보다는 아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아들의 답변이 답이 되었다.
동생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오빠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침묵했다.
그렇게 살아온 엄마였다.
내 인생을, 고단했던 인생을 아들이 보상해 주리라 믿었다.
그런 아들이 장가를 가니 남의 아들이 됐다.
엄마는 배신감과 회의감도 들어했다.
그런 아픔을 그 대상자 아들이 아닌 딸에게 풀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니들 키우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집을 나가고 싶어도 니들 고아될까 봐 나가지도 못했다."
"난 내 인생 니들한테 받친 거야."
이런 얘기도 한두 번이지 얼굴을 볼 때마다 나한테 했다.
내가 뭘 해주길 원해서일까? 아님 그저 한탄의 대상이 내가 된 걸까?
웃긴 건 이런 얘기를 오빠한테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딸. 그것도 가까이 살면서 살뜰히 챙기는 딸한테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이건 오빠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내게 하는 채찍과 같았다.
처음엔 엄마의 말에
"엄마 많이 고생했지."
"엄마가 있어서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지."
"엄마 인생도 있는데 왜 그랬어."
이게 벌써 몇 십 년이다.
좋은 말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고 반발하는 말이 서서히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 그 시대 다 고생하고 살았어."
"그냥 엄마 인생 찾아 나가지. 자식이 뭐라고 그래"
"엄마 인생 우리가 바치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럼 또 엄마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엄마의 고생은 그렇게 구구절절 몇 십 년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구구절절 말 안 해도 자식은 부모가 얼마나 고생해서 우릴 키웠는지 안다.
매 시간, 매일매일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내 머릿속에는 부모님이 어떤 고생을 해서 우릴 키웠는지 알고 있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이 집으로 왔다.
자고 간다며 저녁에 술 한잔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길 했다.
"언니 내가 00을 어떻게 키웠는데. 지가 나한테 이래."
그 흔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가 시작됐다.
그 동생은 이혼을 하고 딸 하나 잘 키우겠다고 분에 넘치게 학원을 보냈으며 먼 거리도 마다 하지 않고 차로 이동 시키며 교육을 시켰다.
내가 볼 땐 그 애는 그 학원에 꼭 가고 싶다거나, 재능이 있는 게 아니였다.
그저 엄마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 학원을 가야 잘 할거 같고, 내가 이렇게 같이 이동하면서 교육을 시키는데 더 열심히 하겠지... 했다.
아이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서서히 힘들어했으며 엄마의 말에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내가 저거를 어떻게 키웠는데!"
얼마 전 조카 물었다.
"고모 고모는 저희 키우실 때 최선을 다 하셨어요?"
오빠의 두 딸은 6살, 1살에 친정엄마에게 왔고, 그 근처에 살면서 같이 아이들을 케어했다.
지금은 30살이 넘었지만, 26년이란 세월은 아이들에게도 엄마에게도 내게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
그런 일련의 과정들에 자잘한 사건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들을 만날 때마다 난 최선을 선택해 결정을 했고 그 결정을 하게 된 것에 실패가 없도록 노력했다.
다시 와서 조카는 그런 고모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고모 고모는 저희 키우실 때 최선을 다 하셨어요?"
"나? 최선을 다했냐고? 음.... 그런 거 같지는 않아."
"고모는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왜요?"
"글쎄? 최선이란 건 내가 죽을 만큼 너희들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한 채로 다 했다는 거 아냐?
근데, 니들은 내가 볼 때 뛰어난 천재적인 재능이 없었지. 만약 그런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면 집안을 팔아서라도 해 줘야겠지. 니들이 천재적인 재능이 뭐가 있었을까..."
"아."
"평범한 것도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니들이 그저 평범하게 남들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난 그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니들 키웠지. 난 그래서 '내가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란말 고모는 싫어해."
나름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선택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이 최선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 잘 살면 되는 것 아니겠나.
엄마는 오빠를 '내가 저를 키울 때 어떻게 키웠는데'하면서 키우셨고 그 하소연을 딸인 나한테 하고 있다.
나름 오빠는 엄마의 노력으로 대학교 교수타이틀을 달고 연구하고 있으니 남들 눈에는 '잘 키웠고 노력의 대가가 있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오빠와 일로 뭔가를 부딪치면 엄마는 가슴앓이를 하셨고 그게 병으로 표출됐다. 응급실도 간 적이 있고(코로나 시절이라 보호자는 응급실 밖에서 밤 12시까지 대기한 적도 있다.) 병원 입원으로 이어졌다.
그럼 오빠에게는 아무 소리 못하고 또 그 불똥이 내게 떨어졌다.
어느 때는 오빠가 먹고 싶다는 김치에 반찬을 해달라고 해 엄마는 그 음식을 준비하다 병이 나셨다.
아들이 해 달라는 말에 기쁘게 했지만 나이 80이 넘은 사람이 그걸 하려고 하니 병이 나버린 것이다.
그럼 또 그 간병은 누구 차지겠는가...
이런 일이 반복처럼 벌어진다.
지금도...
오빠에게 하고 싶어도 말 못 하고 병이 나버리는 엄마와
그런 엄마가 짜증 나서 안 보고 있으면 아프다고 전화가 온다.
그럼 상관을 안 할 수가 없다.
갈수록 엄마는 어디가 아프면 그 아프다는 말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한다.
가끔 보는 것도 아니고 근처에 사니 하루에 3~4번을 봐도 아프다는 얘기시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 엄마 주위를 봐. 나 같은 딸이 있는지."
"........ 크면서 니가 제일 혜택 받고 자랐어."
제일 큰 혜택 아니다. 그저 크는 거에 덤으로 컸다.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얘기하신다.
'옛날 분이시니 이해해야지' 했던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지지 않는다.
'옛날 분이니 이해해야지'가 아니라
'이젠 좀 변하셔야지.'
원래 성격이 이러니 니들이 이해해라.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뭘 고치냐.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고개 숙이며 살았다.
내 말에 토 달고 말대꾸하는 니들이나 고쳐라.
"엄마, 엄마 친구 중에 혼자 사시는 분 계시지."
"많지."
"불쌍해?"
"불쌍하지. 혼자 우둑허니 있을꺼 아냐."
"그럼 엄마는 얼마나 행복해. 나 왔다 갔다 하지. 애(조카)들 있지."
"............."
엄마가 '내가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바로
'나 같은 딸 있는 줄 알아? 엄마 주위를 봐 지금도 혼자계시는 분들이 있잖아.'
이렇게 몇 개월을 하니, 내 칭찬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남편, 즉 사위 칭찬을 한다.
니가 이렇게 나를 보고, 자주 왕래 할 수 있는 건 사위가 맘이 넓어서라고...
이건 분명 '애증'이다.
그저,
"니가 옆에서 챙겨줘서 고맙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나?
오늘도
"엄마 밥 먹었어?"
"입맛 없어. 약 먹으려고 아침 물 말아서 한 숟갈 했어."
"쫌 있다 갈게. 점심에 짜장면이나 먹어 엄마."
"그래 알았다."
엄마의 다른 레퍼토리가 시작됐다.
"이젠 다 된거지. 어떻게 해야 좋게 가는 걸까?"
저 말에 어떤 말로 대쳐 할지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