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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Mar 26. 2021

장식에 대하여 (6)

단청, 이유있는 장식


일러스트 김억중


우리가 매다는 장식은 

서로를 빛내주고, 빛나게 하는 보석이다 

누구나 장식을 하며 살아가는 시대 

장식이 없다며 떠드는 자들의 

말, 그것 또한 장식이다. 

장식을 매달기를 바라는 자들의 꿈, 그것 또한 

장식이다.

[박 영, ‘우리가 매다는 장식은‘ 일부] 


비스 성당에서 보았듯이 장식이 부분에서 전체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빛내주고, 빛내게 하는 보석처럼 제대로 기능하려면, 꼭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절묘하리만치 그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러려면 단순한 욕망이나 말 차원의 ‘장식을 위한 장식’에서 벗어나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 있는 장식’의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한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공산이 크다. 그만큼 지난한 일이다. 


그 둘 사이, 서로 다른 차원을 보다 명료하게 일별해보려면, 아무래도 원형이 잘 보존되지 않은 실제 건물에서 교훈을 얻으려하기보다는 선비들의 체험된 사례가 그대로 녹아있는 시가(詩歌)나 기문 등의 고전문헌들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 그들이 남긴 글속에는 장식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도 있으며, 장식의 기법과 미학에 대한 지혜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식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도 특별히 단청(丹靑)에 주목해 그 진면목을 헤아려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단청은 삼국시대부터 널리 유행했고, 시대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왕궁과 사찰은 물론 상류 주택에 이르기까지 선비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했던 대상으로 관련 텍스트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임진 19년(1232)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고려사절요 16권에 보면 “최우가 재ㆍ추들을 그 집으로 모아, 천도할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에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경도의 호수(戶數)가 10만에 이르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사람들도 자신의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였으나, 최우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여 급기야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차고 넘쳐나는 ‘단청한 좋은 집’들이 눈에 밟혀 차마 이를 버리고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받아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10만에 이르는 집들 거의가 단청을 썼다 했으니, 어마어마한 규모로 보나 비슷비슷한 수준의 품격으로 보나 20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던 고려의 모습을 함축시킬만한 고귀한 장식수단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권근 선생이나 기대승 선생의 기문만 보더라도 고려시대이래 단청은 입힌 것만으로도 부귀영화나 별천지를 상징하는 파워아이콘(Power Icon)이었다.  


계유년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집의 아름답고 훌륭함이 구름 밖에 날아가는 것 같고, 새가 하늘에 비상하는 것 같다. 황금빛과 푸른 색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반공(半空)에 번쩍인다. 

[권근(權近, 1352-1409),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유군 중한(柳君仲翰)이 죽포(竹浦)의 굽이에 정자를 세웠는데, 돌을 베개로 삼고 맑은 물을 굽어본다. 높은 바위가 좌우에 늘어서 있고 무성한 숲이 비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아름다운 화목(花木)들을 나란히 심어 놓고는 그 현판에 써 붙이기를 ‘장춘정(藏春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정자의 서쪽 노는 땅을 개척한 뒤 작은 집을 짓고 ‘매귤(梅橘)’이라 써 붙였는데, 모두 난간을 세우고 단청(丹靑)을 입혀서 영롱하고 완연하며 아늑하고 상쾌하여 별천지와 같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장춘정기(藏春亭記) 일부] 


단청은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목재를 보호하고 목재 표면의 옹이나 흠집 등을 감추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 칠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 뿐 아니라 단청은 건물의 쓰임이나 격에 따라 형식과 내용을 달리했는데, 무엇보다도 마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와 화재를 막기 위한 상징적인 방편이나 길흉화복의 기원수단으로도 쓰였다. 색깔은 기본적으로 오행사상에 따라 청, 적, 황, 흑, 백의 오방색을 기본색으로 배합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기능과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도 분명 ‘이유 있는 장식’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龜, 1564-1635) 선생의 ‘장안사에서 자면서 노승에게 주다’라는 시에서 “눈을 현란하게 하는 단청은 짙은 화장을 한 것과 같다(爛眼丹靑似濃抹)”라 했던 것처럼, 과한 장식은 자칫 안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울러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장식이 되지 않는 것처럼, 단청만 따로 떼어 그 성과를 서둘러 예단하려는 것 역시 사안의 진면목을 비켜가는 일이다. 아무리 상징적인 내용을 잘 표현한 도안인데다 문양과 색깔의 배합, 그리고 시공의 정밀도 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유 있는 장식’의 진정한 가치판단은 그를 주변으로 하고 있는 환경과의 유의미(有意味)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선비들의 관점이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건물 주변의 경관이나 단청이 쓰인  


   

경복궁 근정전 단청


건물의 전체와 부분 사이, 여타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조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명품의 반열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 맥락에 따라 단청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격에 맞는 장식일 수도 있으며, 또 어떤 경우는 단청을 하되 주변과 긴밀한 상호교감(相互交感)을 절묘하게 이루어낸 것만이 ‘이유 있는 장식’의 완결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수(漢水) 북쪽으로 곧장 거슬러 올라가 제천정(濟川亭) 서쪽에 몇 칸짜리 소옥(小屋) 하나가 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데, 그 규모가 단출하고 소박하기만 하여 띠풀로 지붕을 덮고 황토로 벽을 발랐는가 하면 서까래 머리나 난간의 장식도 없을 뿐더러 화려하게 단청을 입히거나 새겨서 그려 넣은 것들도 하나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위치가 높직하고 전망이 툭 터졌음은 물론 맑은 강에 푸른 산이 띠처럼 멀리까지 내비쳐지고 있는 가운데 운연(雲煙)이 끼고 걷힘에 따라 아침과 저녁으로 모습을 달리하는 등 자못 볼 만한 경치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우인(友人) 정자원(鄭紫元)의 별장이다.

[장유(張維, 1587∼1638), 야명정기(夜明亭記), 계곡집(谿谷集) 8권]


장유 선생의 야명정기를 보면 누정의 서까래나 난간의 장식도 없거니와 단청을 새겨 그려 넣은 것이 없다고 쓰여 있는데, 규모가 단출하고 소박한 집이니 단청이 격에 맞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관습적으로 보고 대뜸 판단하려는 것은 금물이다. 기문 속에 기술된 그 주변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말이다. 선생의 견해로는 위치가 높고 전망이 탁 트여있으니, 맑은 강과 푸른 산을 향해 활달하게 관조할 수 있으려면 오히려 화려한 장식이나 단청에 정신이 쏠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격에 맞는 디자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슴에 담아야 할 보물은 밖에 있는 경관만으로 충분하므로 안에다 또 다른 인위적인 장식을 덧붙여 굳이 상충시킬 필요가 없으며 그럴 경우 건물 내부에서는 과감하게 ‘장식 없는 장식’, ‘디자인 없는 디자인’을 실현하는 것이 오히려 고품격 미학의 성취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규모가 작고 부담스런 장식 없이 소박하게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근본적으로는 집주인 스스로 ‘사유하는 눈’으로 대지 상황을 잘 읽고 그에 걸맞게 잘 대처할 줄 알았던 판단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몽송루의 경우처럼 일차적으로 서까래 높이를 조정하여 누각의 전망을 트이게 하였고, 단청을 하더라도 질박하게 하여 검소함을 드러내었던 사례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주변 경관에 지나치게 튀지 않도록 채도와 명도의 세밀한 조정이 뒤따랐을 것이니 특별한 이유 없이 화려하기만 한 단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뿐 아니다. 장유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응희 선생의 ‘부벽루에 올라’라는 시를 보면 야명정과 달리 누각에 단청이 입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물결에 단청 비친 누각이 바위에 섰으니 / 飛閣流丹起石頭

안개 낀 물에 푸른 빛 모래톱이 비치었어라 / 烟波浮碧暎中洲

기둥 사이 홀로 서 있으니 바람이 시원해 / 楹間獨立風蕭爽

이 몸이 백옥루에 올라온 게 아닌가 하노라 / 疑是身登白玉樓

[이응희(李應禧, 1579-1651), 부벽루에 올라(登浮碧樓), 옥담유고]   


누각의 위치가 야명정만큼 월등히 높거나 원경의 조망이 탁월하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벽루에서는 물가에 비친 누각의 근경이 조망의 초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누각이 물가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단청은 이내 일렁이는 물결 따라 아롱대는 모습이 시인의 눈에 일품으로 비쳐졌을 터이니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를 제법 즐길만했을 것이다. 게다가 청, 적, 황, 흑, 백의 오방색을 기본색으로 배합된 단청이 물속에 비친 광경은 흔들거리는 색깔의 파문을 선사하기도 했겠지만 무명의 모래톱을 푸른빛이 반사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니 그 천태만상의 오묘한 감흥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용원정(용원정)


단청을 대면하여 그 도안과 색깔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단청과 물이 서로 교응(交應)하여 빚어낸 경이로운 광경을 누리려 했으니 집주인의 눈썰미와 감흥의 경지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 쯤 되면 딱히 바람이 불어야 시원한 것이 아니라, 누각 기둥 사이에 홀로 서서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기묘한 단청의 파문을 즐겨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시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옥담 선생의 감흥이 어떠했었기에 오죽하면 천상의 옥황상제 궁궐에 있다는 백옥루(白玉樓)에 올라온 게 아닌가 하는 환영에 푹 빠졌던 것일까. 


이밖에도 주변 환경과 교감을 이루어 ‘이유 있는 장식’이 돋보이는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그 중에서도 황현 선생의 환선정의 경우, 단청으로 인해 물속에 노니는 물고기는 물론 물에 비친 새까지도 그 빛을 머금은 물속 광경 또한 일품이 아닐 수 없다. 그 황홀한 색과 다채로운 물결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집짓기 전부터 단청의 효과가 대지주변에 가져다 줄 수 있는 풍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상상해낼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집짓기 전 사유의 집을 탄탄하게 지었던 것이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가을 호숫가 고운 경치가 난간 처마를 휩싸라 / 秋湖褵褷疊欄簷 

고기랑 새랑 단청 빛까지 물속에 다 겸했네 / 魚鳥丹靑水底兼

[황현(黃玹, 1855-1910), 환선정에서 지봉의 원운에 차하다〔喚仙亭次芝峯原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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