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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Nov 12. 2021

배움에 관하여

배움이란 무엇인가



글자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 글자일 뿐인데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온기가 느껴진다. 꼭 내가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차별 연대 혐오를 주제로 강의 듣는 기분도 든다. 대학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내게 주어진 존재’라고 생각한다던 작가. 그의 관계에 대한 태도가 고스란히 글로 이어진다. 이런 게 문체인가 싶다. 꾸며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풍기는 것. 독자가 저절로 그 글에 안길 수 있게 하는 것.


나쁜 의도 없이 한 말인데 기존의 체제를 더 강화시키는 말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누군가를 소외시키며 그들을 주변부로 더 밀어내는 말도 있다. 그런 말들과 다르게 이 책의 말들은 섬세하고 부드럽게 누군가의 세계에 균열을 낸다. 망치로 두들겨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로 녹인다.

 

그간 적잖이 외로웠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태도 자체가 회의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엄마와 아내,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이 고단하기만 한데 나의 관심사가 혈연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어서 타인과 사회로 뻗어나가는 것이 도대체 맞는 일인지. 분수에 넘치는 일은 아닌지. 그래서 결국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날마다 새로운 비극들이 포털 헤드라인에 장식되고 누군가의 불행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비웃고 때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구별 조차 되지 않는 복잡한 세계 속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 그야말로 주제넘는 우스운 일 같다는 회의감. 돈이 되지 않는 것들에 마음을 쏟고 비용을 들이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내게 속삭인다. “너나 잘 살자. 네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잖아. 소수자의 삶에 관심이 있어? 대변하고 싶어? 소수자의 위치에 서본 적도 없으면서 배부른 소리 하는 거잖아. 밥 먹고 뜨뜻하게 몸 뉘일 곳이라도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내 안의 나를 향한 냉소는 끊이지 않는다. 내 자신에게 다정하기란 이토록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나의 고민이 내게 아무런 소득 없는 일이라거나 가치 없는 일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과제’이다. 아무런 물음 없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물론 있고, 근원적인 의미 물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이 삶이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미 물음을 하며, 그 물음에 충분한 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 극도의 절망감을 갖게 된다. 철학이나 종교는 그 자체의 권력 유지가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의미 물음에 대한 갈망에 진지하게 개입하여야 한다. p.111

- 배움에 관하여(강남순 지음)중


내가 읽고 쓰고 공부하는 ,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연대하는 것이 나의 유명세나 경제력,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 싶다.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과 여전히 우정을 나누고 싶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 나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가 좀 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혈연을 넘어 어떤 것에 마음 담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읽었던 책을 책장에서 꺼내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밤에 다시 펴고 이렇게 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려 ‘나와의 관계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 오늘도 금요일의 피로와 허무에 묻혀 맥주와 유튜브로 달아나려는 나를 이 ‘쓰기’가 건져낸다.


강의실에서 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바빠도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러한 무수한 관계망들은 ‘나’의 특정한 역할들을 규정하고 나에게 기대하면서 그 ‘역할의 상자’ 속에 ‘나’를 넣어버린다. 사적인 친밀성의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우리는 무수한 역할 속에서 규정되고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망들이 복잡해지면 질수록 가장 중요한, 모든 관계의 가장 근원이 되는 관계가 무엇인지는 종종 망각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p.137

- 배움에 관하여(강남순 지음)중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나’와 ‘또 다른 나’가 끊임없이 대화해야 성립한다, 그 대화를 통해서만 ‘나’가 가졌던, 깊숙이 가지고 있는, 앞으로도 지키고 싶은 이 삶에의 열정과 애정을 확인하고 긍정하고 격려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형성 중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키우는 작업을 끈기있게 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모든 여타의 사적 공적 관계망 속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고 나는 본다. p.138

- 배움에 관하여(강남순 지음)중


한 개별인으로서 자신의 진정성을 지켜낸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해내야 하는 과제이다. 그 ‘진정한 나 자신’을 형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대면해야 하고 간혹 외부세계로부터 단호한 거리두기를 하는 ‘고독의 공간’ 속에 나를 초대하여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유의 공간 속에서 씨름해야 하는 물음들이 있다. ‘나’에게 진정성이 있는 삶이란,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하는가. 나는 나를 타자들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그들과 관계 맺으며, 어떻게 이 세계에 개입하는가. 어떻게 나의 이 ‘세계 내 존재함’에서 나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한 실천을 하고, 그 진정성을 성숙하게 키워낼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과 대면하지 않을 때 ‘나’는 사회 문화 정치 종교 영역에 만연한 이 가식의 문화 속에 매몰되어서 오스카 와일드의 너 자신이 되라의 의미가 무엇인가란 물음조차 묻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p. 313


배움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인문학적 배움이란 ‘나’ 속에 갇힌 ‘자기충족적 깨달음’만이 아니라 나-타자-세계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며 깨우침이다. 이러한 의미의 배움이란 나의 인식론적 사각지대에 대한 지속적 인식을 통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확장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배움이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이 세계 속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인식을 통하여 그 ‘나’를 ‘타자’와 ‘세계’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배움이 이루어지는 통로는 매번 참으로 다양하며 대체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될 뿐이다.
나 자신의 인식론적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배움을 멈춘 인간은 ‘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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