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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May 06. 2020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들.

인에이블러의 고백

나와 내 뿌리가 되는 사람들의 행동과 그 이면을 파고들어 해석하는 일.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복기하고 사건들을 떠올리며 해체하는 이 작업은 내게 꽤나 중요하다. 그때 그 사람이 내게 했던 행동들이 그저 내가 미워서거나 내가 그에게 그런 존재밖에 안되서거나 혹은 내가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건 그 사람의 문제였다거나, 그 사람의 마음이 아팠다는 것들을 발견해나가면서 내 과거를 위로하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나의 조부모와 부모 간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보며, 가정 내에서 한 개인의 아픔과 뒤틀려짐이 구성원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을 직접 보고 겪으며 적어도 나는 이런 불행의 고리를 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인지 남편과 아이들을 대할 때 내 맘 속 기저에는 두려운 마음이 깔려있다. 혹시라도 내가 그들을, 그들과의 관계를 망치는 사람은 아닐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읽게 되고 끊임없이 돌아본다. 관계 가운데 너무 움츠려도 좋을 것은 없으나 이게 또 관계에 있어서 나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같다. 일종의 자책을 통한 불안 해소랄까? 이것도 직면하고 마주하고 싸우다보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살아간다기보다 헤쳐나간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라는 책에선 인에이블러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인에이블러란(enabler) 누군가를 도와준다고 본인은 생각하지만 실제론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의존자가 자율적으로 본인의 삶을 통해 성장할 기회를 박탈하는 사람을 뜻한다. 자기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감정을 통해 자아존중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동정심 많고 다른 이를 돕는 착한 심성으로 볼 수 있지만, 이 행동의 동기가 본인의 만족과 효용을 채우기 위한 방향으로 굳어지는 순간 의존자는 물론이고 본인까지 속이게 되며 그 가운데 관계의 파탄은 당연한 수순이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족들을 보며 ‘어휴, 힘들어, 나 없이 어찌 살려고 그래?’ 하면서 본인이 없는 가족의 그림은 그려질 수 없음에 흐뭇함이 생기는 사람. 나란 사람의 자존감이 나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책임지는 데 달려있는 사람.

읽다 보니 내 주변 5-60대 여성분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엄마와 아내로, 육아와 가사노동자로 일해왔지만 가족과 사회가 몰라주고 늙어선 손주들을 봐주며, 본인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보다는, 본인이 없으면 어렵고 힘들어지는 자식의 삶을 살아가는 엄마들. 몸이 망가지고 힘들어도 황혼 육아에 올인하는 할머니들.

나 역시 대학시절 누군가가 힘들 때 나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관계를 통해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메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긴밀하고 깊은 관계가 주는 안도감.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짐을 같이 나눠지기엔 부족했으며 지속적인 의존자와의 관계에 지쳐 거리를 두면, 상대는 배신을 당했다고 느껴 멀어졌던 사건들이 기억이 났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가족들에게, 어떤 집단에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를 쓰며 나를 속일 때가 있다. 그 가운데 느껴지는 만족감을 내 정체성으로, 자존감으로 삼으며 불안 불안하게 내 삶을 지탱해나갈 때가 있다. 나도 모른 채, 나를 속이게 되어버리는. 그러면서 만족감을 얻고, 내가 있어야 완전해지는 곳이 내 것 같아서 좋고. 하지만 이젠 안다. 그런 만족감은 빨리 소진된다는 것, 그리고 이제 내겐 그런 것들이 피곤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몇몇 구절을 붙인다.

* 나는 결국엔 가족 구성원 각각이 독자적이고 매우 상이한 개인이고 나를 연장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나는 자기 방어적인 거짓에 다시는 빠져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한다.

* 인에이블라와 의존자는 서로의 낮은 자존감에 기반을 둔 관계를 발전시킨다. 이들은 각자 불안정한 위치에서 출발하여 서로의 불안정함을 바탕으로 안정적 관계를 이어가려 한다.
*
*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품는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정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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