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한 여자
1957년 1월 25일, 서울 출생, 이름 이영숙. 본인 이름의 한자에 흔하지 않은 ‘길영’ 자를 썼다고 자랑스러워했던 이 사람을 나는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여자이지만 내겐 여자가 아닌 그저 엄마인 사람. 그래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엄마’라는 기준으로만 삶이 평가되고 기억될 사람.
아니 에르노는 <한 여자>라는 책에 소설의 형식을 빌려 어머니 이야기를 썼다. 모녀관계 특유의 극적인 갈등이나 사건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다. 그저 한 인간으로 태어나 그 시대의 가난과 차별과 혼란을 받아내고 살아온 엄마의 일생, 그것을 보고 자란 아니 에르노 속에 각인된 엄마의 이미지. 또 그런 엄마를 받아내고 살아왔을 에르노의 이야기.
‘ 그녀는 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가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내 몸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마도 가슴과 엉덩이가 생긴다는 것이 내가 남자애들 뒤나 쫓아다니며 더 이상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게 된다는 그러한 위협을 의미하는 듯했다. ‘ (61)
자라는 딸이 감당이 되지 않는 이 마음. 커가는 아일 보며 불안 속에서 흔들렸을 그 여자. 나 역시 여섯 살 딸애가 아이답지 않은, 특히 여자의 모습이 보일 때면 멈칫하게 된다. 딸아이가 나와 비슷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까? 아이의 순수함을 잃고, 어른인 나처럼 마음속에 교활한 생각, 음흉한 생각, 계산적인 생각들을 품을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딸의 첫 생리가 두렵고, 언젠가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 아이가 여자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이 무섭다.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서늘한 건 왜일까.
‘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리고 교양을 갖추려는 욕망과 실제로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깊은 구렁텅이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 (63)
이 대목을 지나면서는 한없이 슬퍼졌다. 내가 누군가의 부끄러움의 대상, 증오, 미움,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지고 불안한데. 그것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그리 될 수 있다니. 맙소사, 죽고 싶을 것 같아.
‘ 가끔씩 집에서 어머니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맞닥뜨리는 일이 벌어진다. 그저께는, 밧줄 제조 공장에서 기계 때문에 휘어버린 손가락에 끼었던 골무였다. ‘ (69)
얼마나 슬픈 문장인지. 그 골무를 보자마자 아니 에르노의 마음은 무너졌을 텐데. 너무나도 담담하잖아. 이렇게 글에 여백을 남겨두는 게 이리도 슬플 줄이야. 나에게 있어 작가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바를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생생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멋있게. 그런데 사실만을 나열했더니 그 가운데 비어있는 작가의 생각, 마음, 감정을 상상하고 유추하게 된다. 빈 공간이 나의 몫, 즉 읽는 사람의 몫으로 다가온다. 그래, 사실만 써도 충분하다. 모두 묘사하지 않는 것도 좋은 글쓰기일 수가 있구나 싶다.
‘어머니는 결혼 전의 내 삶만큼이나 먼 존재였다.’ (73)
그녀의 세포에서 만들어진 난자라는 알에서 생겨나, 정확히는 아홉 달을 그 뱃속에서 그녀의 피와 살을 먹고 근육과 뼈와 피부가 만들어진 내가, 그녀와 멀어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음이 상기됐다. 인생이라는 게 참 슬프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고 나의 엄마,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그려보았다. 엄마로서만 평가되고 기억되었던 그녀를 조용히 불러내었다. 지어진 이름처럼, 길 영이라는 한자처럼 오래 살진 못했던 한 여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늘 관계로 정의되고 관계가 부여함 역할과 책임에 입각해 그들을 보기 마련인데. 관계로 얽혀있는 나의 사람들을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해 글을 써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