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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홍 Nov 13. 2023

유치할 결심


'카레맛 똥, 똥맛 카레. 골라봐.'


 평일 낮에 하는 K와의 카톡은 대부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카레맛 똥이냐 똥맛 카레냐부터 시작해서 가방 없이 살기냐 신발 없이 살기냐 같은 살면서 마주할 리 없는 곤란한 선택지를 두고 일생일대의 결정처럼 숙고하는 것. 우리는 이걸 '극 N들만 아는 놀이'라 부르는데 이때 중요한 건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선택의 이유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밸런스 게임을 하면서 논리를 요구하는 게 우습긴 하나 난 이 과정에서 나오는 말들이 꽤 철학적이어서 마음에 든다.


'맛이 무슨 상관이야, 본질이 중요하지. 난 카레.'
'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답하기 어려운 선택지를 제시해 상대방이 기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선택지를 제시한 사람은 자신이 내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답을 하는 상대방이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에 참으로 곤란한 난이도임을 인정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논리를 펼치며 청산유수로 답하던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짜릿함이란.. 마침내 'ㅠㅠ'로서 그 패배를 인정하는 메시지를 보았을 때의 성취감은 다른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떻게 서른을 목전에 둔 성인들이 이토록 유치하게 놀겠냐마는 끼리끼리라는 진리답게 K와 같은 대학 동기인 J와 B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J는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곤란한 기색 없이 답한다는 점(사실상 밸런스 게임의 챔피언), B는 답하기 곤란해지면 '처맞을래'와 같은 다소 폭력적인 기세로 상대방을 찍어 누른다는 점이 게임의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밸런스 게임은 K와 나만 짬짬이 하곤 한다.

 사실 밸런스 게임 외에도 이들과 만나서 하는 일은 초등학생의 여가 시간과 다를 바 없다. 핵불닭볶음면이나 신길동 매운 짬뽕처럼 음식인가 싶게 매운 걸 먹는다든지, 막차 시간이 지나도록 노래방에서 춤을 춘다든지, 보드게임 카페에서 멱살을 잡곤 하는 일들. 유치함에도 레벨이 있다면 우린 꽤 수준이 높은 편이라 아마 초등학생들도 한 수 접고 들어와야 할 것이다.

 사실 한 때는 이런 친구들에게 불만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학생 때와 다르게 우린 이제 돈도 벌고 시간도 있으니까. 이토록 좋아하는 친구들과도 여유와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아주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소주나 막걸리 말고도 와인이나 칵테일을 마실 수 있었고 맥도날드나 노래방 대신 레스토랑이나 전시회쯤은 갈 수 있는데. 하지만 번번이 그들의 무관심과 불호 의사에 어쩔 수 없는 취향 차이를 인정하면서 포기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각자의 할 일과 약속에 치여 이전처럼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지친 어느 날, 공원 놀이터에서 철봉 하나를 두고 낄낄거리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깨달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은 친구들이 있다는 게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여유나 사치보다는 아무 생각도 않고 편하게 웃는 일이 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난 철없는 친구들이 영영 지금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자주 아파하고 힘들어할 나에게 앞으로도 이들은 짓궂은 농담과 무용한 이야기로 나를 살아가게 하리라 믿는다. 혹여 세상이 나를 외면하는 순간이 온다 해도 아주 오랜 시간 나눠온 의미 없는 이야기들과 보잘것없는 시간들이 앞으로의 나를 살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 무용함으로 이제 내 인생의 일부가 된 그들이 건강 하기를,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아프지 않기를 바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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