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
최근 언어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인식과 관념이 현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고민하며 헤매다가 찾은 일종의 중간 기착점이다. 도구적 차원의 단순 의사소통을 넘어선,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인간 상호작용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리적·물질적 현실이나 현상은 언어와 별개로 그 자체로 존재한다. 다만,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어떠한 대상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어떠한 집단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해당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특성을 갖는지, 해당 대상에 대한 결정이나 조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공유된 인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의 공유에 있어 언어는 필수적이다.
설령 특정한 행위나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라도, 어떤 대상을 어떻게 묘사하고 기술할지를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권력 행위다. 그 대상을 정의하는 데 있어 기술자의 의도와 관점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의 도구는, 당연히 언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철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조금씩 그의 이론을 탐색해 나갈 생각이며, 그 이전에 그의 삶에서 큰 울림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문득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났으나 영국인으로서 생을 마감한 비트겐슈타인이 어디에 묻혔는지 궁금해졌다.
더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삶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무척이나 특별했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행복하진 못했다. 네 형 중 세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바로 위 형인 파울은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손을 잃었다. 루트비히 스스로도 평생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08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맨체스터 대학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수학과 수학철학에도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한국에도 서양 철학사로 잘 알려진 버트란드 러셀의 수학의 원리들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을 접하고, 러셀이 교수로 재직 중이던 케임브리지 대학에 무작정 찾아갔다.
러셀을 따라다니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에 재능이 있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했고, 러셀은 방학 동안 글을 한 편 써오라고 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비트겐슈타인이 쓴 글을 읽은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러셀의 지도를 받은 지 1년 반 정도가 지나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노르웨이 해안가에 오두막을 짓고 1914년 여름까지 그곳에서 칩거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군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에 자원입대하여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그는 전쟁 중에도 철학적 사색을 멈추지 않았으며,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훗날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책의 원고로 이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통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철학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이 무렵 그는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모든 재산을 누이들과 남은 형에게 나누어 주었고, 예술가나 학자를 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산간 마을 교사로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도했고, 학부모들의 불만을 사면서 학교를 여러 차례 옮겨야 했다. 마지막으로 근무한 학교에서는 학생에게 체벌을 가한 사건이 문제가 되어 결국 교직을 떠나야 했다.
여러 사람들의 설득 끝에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가 되어 있던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논고'를 박사 논문으로 인정받아 학위를 수여받았고, 트리니티 컬리지의 펠로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세계 유수 대학의 교수직조차 그를 묶어 놓지 못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권위적인 분위기를 불편해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런던의 병원에서 의료 지원 인력으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케임브리지에 머물렀지만, 1947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철학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암에 걸렸으나, 특별한 치료를 통해 삶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4월 29일,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크게 감명받은 나는 구글신에게 'Where is Wittgenstein buried?'라고 물어봤고, 구글은 친절하게 "The chapel for Ascension Parish Burial Ground off Huntingdon Road, Cambridge, UK."라고 알려주었다.
응?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이잖아? 그래서 내친김에 곧바로 가보았다. 주소는 "10 All Souls Ln, Cambridge CB3 0EA"인데, 길의 이름조차 뭔가 무덤이 있을법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묘지가 선산이나 멀리 떨어진 교외 공원묘원에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서양의 묘지는 주거지와 맞닿아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잠든 묘역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있으며, 해당 묘원과 함께 있는 교회는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
평일 오전이어서 묘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안내판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선 아이들과 함께 걷던 동네 주민인듯한 아주머니가 '우리도 묘지를 가로질러 갈까?' 하더니 나를 앞서가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은 함께 존재하고, 하나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치열한 삶일지라도 죽음은 고요하다.
대문자로 쓰인 LUDWIG WITTGENSTEIN 글자 밑에 1889-1951라는 숫자가 적힌 묘석은 마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처럼 느껴졌다.
한국의 기준으로 잘 관리된 무덤이라고 하긴 힘들지만, 여느 서양의 무덤과 별 다를 것은 없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누군가 일부러 모아 놓았을 것 같은 솔방울들이 묘석을 둘러싸고 있고, 시들었을지언정 아직도 헌화된 꽃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무덤 앞에 몇 분간 쭈그리고 앉아 내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무덤 앞에 동양인 남자 혼자 그러고 있는 것이 스스로도 불편해서 오래 있을 순 없었다.
훗날 내가 그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또 나의 연구에 그의 철학을 녹여낼 수 있다면 그때는 한 송이 꽃을 들고 다시 찾아오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독일어인 "Auf Wiedershen (see you again)"을 읊조리며 그의 무덤을 떠났다.
학술저널에 게재한 글이 지난주 초 게재 확정되었다. 작년 말에 투고하였으나 2월에서야 리뷰 피드백을 받았고, 다시 수정본을 낸 것이 통과된 것이다. 아마 5월쯤에 찍혀 나올 것 같다.
그간 직장 업무로든 학교 과제로든 많은 글을 써왔지만, 학술저널에 투고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좋은 공부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논문에서 '익명의 심사자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봤을 때 인사치레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직접 해보니 진심이란 걸 깨달았다.
피드백을 받은 직후엔 '내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지적도 없진 않았지만, 꾹 참고 최대한 심사 의견을 반영하다 보니 스스로가 보기에도 글의 논지가 보다 분명해진 것이 느껴졌다.
연구자로서는 이제 막 출발점에 서는 중이지만, 저널에 기고를 해보고 나니 왜 저널이 존재하고, 왜 저널에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쓴 주제에 대해서 나의 관점과 주장이 하나는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다른 저널에도 또 도전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