쎈띠멍 SENTIMENT
구 해운대역사 뒤편의 작은 마을 상권. 365일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 거리를 흔히 해리단길이라 부른다. 2019년 부산에 처음 왔을 때부터 해리단길을 종종 찾았다. 지역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던 나는 무작정 이 작은 마을을 산책하곤 했다. 단지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그러다 우연히 권민정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쎈띠멍을 발견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만난 창작자의 공간인 쎈띠멍 스튜디오는 내게 ‘부산에도 이렇게 자신의 브랜드를 일구는 감각적인 크리에이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의 물꼬를 트게 했다. 낯선 부산에 처음 도착한 겨울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쎈띠멍으로 기억의 고리가 이어진다. 처음은, 언제나 그렇듯 어떤 기억의 흔적을 짙게 남긴다.
쎈띠멍은 권민정 디자이너가 직접 기록한 여행의 이미지를 이용해 다양한 디자인 문구를 제작하고 선보인다. 지난 2018년 온라인과 오프라인 숍인숍 형태로 브랜드 운영을 시작했고 다음 해에 해리단길 쇼룸을 만든 것. 공간은 섬세하고 정갈한 디자이너의 모습을 놀랍도록 쏙 빼닮았다. 흐트러짐 없이 놓인 사물들, 포스터를 소개하는 글에서 느껴지는 정성, 공간의 온도까지. 오픈 이후 쎈띠멍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그 한결같음에 오늘도 사람들은 쎈띠멍을 찾는다.
쎈띠멍 대표
2022년 6월 24일 금요일
디자이너님 오랜만이에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권민정입니다. 문구와 포스터를 만들며 판매도 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다니···. 모두의 바람 아닐까 싶어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스트레스가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즐기며 일하고 있답니다.
좋네요. 쎈띠멍은 어떤 브랜드인가요?
제가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고 떠난 곳이 프랑스였어요. 원래는 다른 나라도 함께 보려고 간 건데 처음 도착한 프랑스가 정말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파리에서만 3주를 머물렀죠. 같은 길을 산책하고 또 산책하면서···. 스튜디오 이름은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을 담아 프랑스어로 쎈띠멍이라 지었어요. 감정, 생각, 감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쎈띠멍은 감각적이고 합리적인 제품을 소개하는 브랜드예요. 여행을 다니며 마주치는 여러 스폿에서 제가 느낀 감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 이미지를 문구에 접목시켜 제품을 만들어요.
그리고 쎈띠멍 제품을 디자인하는 작업실이자 고객님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쎈띠멍 스튜디오죠. 처음 쎈띠멍은 온라인 숍과 오프라인 편집숍 입점 형태로 문구류만 자그맣게 소개하는 브랜드였어요. 그러다 제가 평소 메모하거나 기록한 것들도 제품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이어리, 메모지 등 자체 제작하는 상품의 종류를 조금씩 늘려갔죠. 여기에 제가 좋아했던 사진들을 접목해 쎈띠멍만의 디자인을 선보였고요.
맞아요. 쎈띠멍을 떠올리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죠. 사진은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건가요?
어려서부터 카메라 들고 여행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처음 DSLR 카메라를 접했죠. 지금 보면 형편없는 수준의 사진들이지만, 그 당시 DSLR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게 정말 즐거웠어요.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늘 제 옆엔 카메라가 있었고요. 카메라 브랜드, 기종에 따라서 사진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게 참 매력적이었죠. 그렇게 여러 카메라를 떠돌다가 지금의 카메라 세팅으로 정착했네요.
무슨 카메라를 쓰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손님들도 정말 많이 물어보세요. 이제는 구형 모델이긴 하지만, 후지필름의 X100F 모델을 쓰고 있어요. 들고 다니기 딱 좋은 크기를 가졌죠. 그리고 제가 후지 특유의 저채도 감성을 좋아해요. 쎈띠멍이 추구하는 이미지의 톤과 결이 잘 맞거든요.
문득 디자이너님의 전공이 궁금해졌어요.
저는 사실 회화를 전공했어요. 더 이상 페인팅을 하지는 않지만, 그 경험이 아트 포스터를 소개하고 사진과 디자인 작업을 하는 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제가 오리지널 아트 · 디자인 포스터를 전시하면서 항상 저만의 작품 해설이 담긴 캡션을 함께 두는데요. 학창 시절에 다양한 회화 작품과 작가를 공부했던 경험이 있어 더욱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분명 문화예술이라는 연결고리는 있지만, 그럼에도 예고와 예대 시절을 거치며 계속해서 페인팅 작업을 해오시던 분이 이렇게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케이스가 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쎈띠멍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처음부터 ‘언젠가 내 공간을 꾸려야지’라는 막연한 꿈은 가지고 있었어요. 대학생 때 서울에 머물면서 SPA 브랜드 매장에서 일하다 공간을 꾸미고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근무하던 곳이 대형 점포였고 마케팅 효과가 큰 위치에 있어 비주얼 머천다이징의 힘이 여실히 드러났어요. 비주얼 머천다이저(Visual Merchandiser, 이하 VMD)는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시각적으로 연출하고 관리하는 직업인데요. 티셔츠의 색깔부터 매장 내 진열 분위기까지 관리하고, 연출한 공간 기획이 매출로 이어지는 점이 신기했어요. 패션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고 그때부터 VMD라는 직군 자체에 흥미가 생겼죠. 컬러리스트, VMD 자격증 등을 취득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준비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타지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니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라고요. 크게 아팠던 건 아니고 사소하게 아픈 일이 자꾸 생겼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타지 생활과 새로운 일을 준비하며 오는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순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부산에서 VMD를 채용하는 편집숍을 발견하고 내려오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근무하며 감각을 키우고 일하는 방식을 많이 배웠죠. 그렇게 부산에서 VMD로 지내는 중 ‘서울에서 배웠던 잡지 레이아웃과 편집디자인을 다시 해보자!’ 해서 평소에 좋아했던 문구 제품을 하나둘 만들기 시작했어요. 문구와 제가 촬영한 사진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쎈띠멍 제품들이 탄생했죠.
쎈띠멍은 어디에서든 잘 보이는 곳에 있죠. 쇼룸 위치가 참 좋아요.
제가 계약할 당시엔 해리단길이 지금처럼 활성화된 상권은 아니었어요. 조금 더 발품을 팔았다면 훨씬 더 좋은 자리에서 쎈띠멍을 운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조금 있어요. (웃음) 원래 이 자리엔 20, 30년 장판집 하시던 사장님의 가게가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딱 한 군데 부동산에만 이 매물을 내놨더라고요. 제가 우연히 그 부동산을 찾아갔고, 공인중개사님이 여길 보여주자마자 바로 계약했죠.
많은 분이 낯설어했던 처음과 달리 이제 쎈띠멍은 로컬에서 감도 높은 디자인 제품을 만나려면 먼저 찾아야 하는 곳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3년간 스토어를 운영하며 이런 시선의 변화를 경험하시나요?
처음엔 디자인 문구, 포스터를 보러 오시는 분들보다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보시고 “사진 찍나요?” 하며 문을 두드리시는 분들이 더 많았어요. 일반 사진관으로 종종 오해받았죠. 다행히 최근에는 입점 문의도 늘어나고, 택시 목적지로 처음부터 쎈띠멍 스튜디오를 기사님께 말씀드리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정말 감사하죠.
쎈띠멍은 2019년 쇼룸을 오픈한 직후 팬데믹 사태를 겪었습니다. 스튜디오 운영도 이에 영향을 많이 받았나요?
제가 여행을 좋아하니 야심 차게 여행자를 위한 트래블 노트를 출시했었는데요. 출시 직후 팬데믹이 터져버렸죠. 이제는 다시 트래블 노트를 준비해 봐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하고 있어요. 쇼룸은 오픈 후 1년이 지나도록 조용한 날이 많았어요. 코로나19로 무엇보다 아쉬웠던 건 여행길이 막힌 거예요. 저는 주로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이미지로 디자인하는데 여행을 못 가니 자연스레 소재가 고갈되더라고요. 신제품 출시도 뜸해졌죠.
제품 출시가 더뎌진 대신 오리지널 아트 포스터를 더욱 다양하게 선보이며 나름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어요. 온라인에서 더욱 디깅하며 감각적인 포스터를 셀렉하고 있죠. 해외 포스터 배급사와 온라인으로 연락하며 업무를 하게 된 것도 코로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이야긴데 저는 합리적인 가격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오리지널 아트 포스터 가격이 저렴하진 않거든요. 부산에서도 일상적으로 아트 포스터를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자 마진을 줄여서라도 꾸준하게 포스터를 소개하고자 애쓰고 있답니다.
쎈띠멍 스튜디오에서는 매거진 B, 펜코 등 다양한 브랜드의 감도 높은 제품도 만나볼 수 있어요. 브랜드를 선보이는 쎈띠멍만의 기준이 있나요?
공간이 넓지 않아 다양하게 선보일 순 없지만, 페이퍼 숍이라는 기준에 맞게 종이를 주제로 한 흥미로운 제품과 부산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완성도 높은 브랜드를 보여드리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소개하고픈 제품이 있을까요?
우선, 제가 셀렉해 선보이는 것 중엔 ‘헵(Hep)’ 매거진을 소개하고 싶어요. 쎈띠멍을 오픈하기 전부터 즐겨 보던 매거진인데 얼마 전 네 번째 호가 출간됐어요. 헵은 각호에 하나의 음악을 선정해 곡과 뮤지션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전체 무드를 이끌어가는 필름 매거진이죠. 책의 디자인도 감각적이고 내용도 정말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어요.
제가 디자인한 제품 중에선 다이어리 ‘아벡 쎈띠멍 (avec sentiments)’을 소개할게요. 매장을 운영하다 보니 심플한 월간 다이어리를 찾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간단하게 스케줄을 정리할 수 있도록 내지를 디자인했고, 표지는 PVC 커버로 되어있어 가방에 넣고 다녀도 손상될 일이 없죠. 제작하는 데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제품이지만, 실용적이고 보기에도 좋아 추천하고 싶어요. 무드별로 표지를 바꿔 새로운 버전을 계속 디자인하려고 해요.
부산에 여름이 찾아왔어요. 올해도 많은 분이 쎈띠멍을 방문할 텐데요. 스튜디오를 찾는 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세요?
쎈띠멍 스튜디오는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상품을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공간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제 취향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이 공간이 저와 참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그래서 이곳을 찾아주시는 모든 분이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참 좋은 곳으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실제로도 선물 같은 곳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신 고객님이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까지도 그 말이 제게 선물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문구를 소개하는 것과 포스터를 큐레이션 하는 것 사이에서 앞으로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커요. 문구를 판매하는 일이 사실 손이 많이 가거든요. 하나하나 포장은 물론, 스티커도 붙여야 하고, 계속해서 신상품도 소개해야 해요. 자잘하게 해야할 일이 많죠. 제가 문구를 좋아해서 시작한 쎈띠멍이지만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죠. 그렇다고 포스터만 전문적으로 소개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기도 하고, 지역 특성상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에겐 아트 포스터보다는 문구류가 더 접근성 높은 카테고리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현실적인 상황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어떻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이 고민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이어갈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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