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억해
내가 뽑은 뽑기는 모두 꽝, 몰라서 찍으면 항상 오답, 방향이 헷갈릴 때 내가 선택한 길은 잘못된 길. 인생에서 참 운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내게 이상하게도 사람 운은 많았다. 애써 붙잡지 않아도 내 곁에 남아주는 친구들은 늘 한결같이 나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한다고 중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다 끊고 지냈는데 지금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은 그때 친구들이다. 나와 연락이 되든 안되든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든 우린 한결같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타지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연고 하나 없는 내게 과분한 친절을 베풀었다. 세레나 언니 부부도, 나를 초대했던 팻과 앤젤라도 자기 집처럼 생각하라며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일본 음식들을 잔뜩 만들어준 하루나, 둘만의 끈끈한 우정 사이에 내 자리를 내어준 렌과 모모코, 한 학기 잘 버텼다며 의미 있는 선물을 건넨 안, 격하게 환영해준 에어비앤비 호스트까지. 내가 어떻게 이 모두를 잊을 수 있을까.
나도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그러니 슬픈 생각하지 말라고. 민영이가 무심히 던진 그 한마디는 눈물이 핑 돌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마냥 행복해 보인다고, 마냥 편해 보인다고 말하지만 사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좋았다, 그리웠다, 즐거웠다, 우울했다, 행복했다, 외로웠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가기 전 외롭거나 힘들면 연락하라고 했던 친구들은 지금 모두 일상에 치여 바쁘다. 나는 이렇게 시간이 남아돌아 내일은 뭘 먹을까 하는 고민이나 하고 있지만 그 아이들은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우울해하던 중 민영이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한 마디 하면 질문을 세 개씩 던져주었고 그런 사소한 행동들은 너를 잊지 않고 있다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너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의지하고 있었고 그런 나를 버거워할까 봐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너의 사소한 관심이 나를 버티게 만들었다고 잘 이겨낼 수 있게 믿어주고 응원해주어 고맙다고 말하면 나 또한 너에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국밥이 너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주영이와 현서는 인스턴트 육개장과 라면이라도 보내줄까 물으며 안쓰러워했다. 한국보다 비싼 값에 구입해야 한다는 흠이 있긴 하지만 멜버른 시티로 나가면 한인 마트가 몇 개 있어 이곳에서도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는 것이 아무리 비싸도 한국에서 부치는 택배비보단 저렴할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준다는 것은, 누군가의 돌봄 속에 있다는 기분은 언제나 좋다.
어느 날 갑자기 별다른 이유 없이 수진이는 나에게 페이스톡을 걸었다. 잠옷을 입고 화장을 다 지우고 앞머리에 롤을 말고 있던, 한마디로 하루 중 가장 내가 못생기고 초췌한 시간이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전화를 받았다. 나의 못난 모습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너의 빈자리가 느껴진다고, 네가 없으니 참 허전하다고 그 말이 오늘따라 위로가 된다는 것을 너는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