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축적해온 中企 노하우 상속세 부담으로 빼앗겨선 안돼
30년 넘게 사용하던 미제 손톱깎이를 버리고 얼마 전 국산 제품을 샀다. 베트남전에 영관급 장교로 참전한 장인이 가져온 걸 아내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23년 동안이나 사용하던 국산 세탁기와 냉장고를 용량이 좀 더 큰 신형으로 교체했다.
여전히 사용 가능한 상태였지만, 나의 끈질긴 권유에 아내가 백기를 들었다. 미국과 일본의 아성이었던 세계 가전시장을 우리가 장악한 저력이 우연이 아닌 걸 실감했다. 신혼 때 구입한 국산 다리미는 현재도 사용 중이다.
장년층 이상은 누구나 처음 미제를 접했을 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뇌리에도 아버지가 미군 부대 군무원이었던 초등학교 친구에게 선물받았던 미제 볼펜과 질 좋은 종이가 각인돼 있다. 지금은 미제보다 국산이라야 더 안심이 되니,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바다 같은 변화(sea change)다. 내구성이나 식품 접촉 제품이 아닌 제품은 국적을 가리지 않지만, 치간 칫솔, 멀티탭(power strip) 등 안전과 관련된 제품은 웬만하면 꼭 국내 중소기업이 만든 제품만 사용한다.
새로 산 국산 손톱깎기가 얼마나 부드럽고 매끄럽게 잘리는지, 포정이 칼을 사용해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는지도 소가 몰랐다는 포정해우(庖丁解牛)가 생각날 정도다. 잘려진 손톱이 사방으로 튀지 않게 본체에 수납공간을 둔 것도 고객의 편의를 염두에 둔 아이디어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국산 제품을 만드는 기업 중 상당수가 정작 시장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막대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반세기 넘게 일군 세계적인 손톱깎기 기업을 외국계 펀드에 넘겨야 했던 상황은 당하는 입장에선 감내하기 힘든 일이 아닐 듯싶다. 작지만 기술력 있는 기업이 유지되지 않으면 산업 생태계 전체가 무너진다.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필자도 막상 자영업을 해보니 직원 한 명 고용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님을 절감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세제 정책이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하게 조정될 필요가 있다. 기업의 존속과 가업의 유지가 단순히 개인의 부의 이전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안정성과 국가 경제의 지속 가능성과도 맞닿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오랜 세월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가 해외로 유출되거나 국내 산업 기반이 약화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상속 시점이 아닌 실질적인 처분 시점에 과세하는 방안, 가업 승계를 위한 세제 지원 확대, 경영 지속성을 위한 유인책 마련 등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정책적 보완이 절실하다. 이런 고민은 비단 손톱깎기 같은 소형 정밀업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방산 등에 가려 있지만, 사실 이러한 산업들을 가능하게 하는 숨은 주역들이 있는데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열처리, 표면처리 같은 뿌리 산업이다.
과거에 국내외 협력업체와 거래하면서 수없이 경험해 봐서 알지만, 중국이나 동남아 업체는 초도 물량과 양산의 품질이나 재질이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같은 값이면 무조건 국산을 사용하는 이유는 품질 편차가 거의 없고 원료, 위생, 환경 규제가 훨씬 엄격하기 때문이다.
강한 나라는 화려한 산업으로만 세워지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버텨주는 ‘뿌리’가 단단해야 나무가 쓰러지지 않듯, 산업의 뿌리를 지키는 일은 곧 국가의 내일을 세우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경쟁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경쟁의 기반을 더 깊고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다. 뿌리가 튼튼할 때, 대한민국 산업의 나무는 다시 한번 높이 솟아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