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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누구에나 필요한 것이지만...

박균호, 『나의 첫 철학 읽기 수업』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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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만큼 철학이 대중화된 곳이 없다는 얘기도 있었다. 거리마다 보이는 ‘철학관’ 때문이다. 이 얘기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철학이 희화화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 들을 때마다 씁쓸하다. 대학마다 철학과와 같은 학과를 없애려는 움직임을 보면서는(이미 없앤 곳도 많다) 서글프면서도 내가 그런 과를 선택하지 않은 데 대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철학은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철학이 좀 팔리는 데가 있다. 바로 대학 입학을 위한 책읽기, 혹은 논술 소재 등이 그렇다. 거기서도 진짜 철학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철학이 관심을 받기는 받을 것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 책에 “10대를 위한”이라는 딱지가 그렇게 달가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수요가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고,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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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0대를 위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왔지만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결코 10대‘만’을 위한 철학은 아니다. 철학이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 온갖 갈림길에서 선택의 잣대가 되어 주고, 평소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10대부터 알아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20대, 30대가 되고, 그것을 넘어서 언제라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을 수단으로 여길지, 목적으로 존중할지에 대한 ‘철학’이 어디 10대만이 필요한 것인가? 오히려 높은 지위를 지닌 이들에게 더 필요한 철학이 아닌가? 물론 그런 태도는 10대부터 길러지는 것이니, 정말 10대에게 필요한 철학이 되겠지만 말이다.


모두 열여덟 꼭지로 구성된 이 책은 이른바 고전이라고 하는 책을 중심으로 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친구의 잘못을 지적해야 하는 문제를 위해서 ‘무려’ 칸트의 『정신현상학』에서 시작하고, 독서가 유익하기만 할까 하는 문제를 위해서는(책 읽으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문제라니)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 텍스트다. 철학책만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통해 님비 문제에 대해 토론을 유도한다. 서양의 책만 다루는 것도 아니다. 『맹자』와 『한비자』, 『논어』 등을 통해 결혼에 관한 문제, 무료 급식에 관한 논란, 통섭형 인간과 대학 수시 입학 제도의 맹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문화의 우열에 관한 문제라든가 악법에 관한 문제, 종교에 관한 문제 등 사회적인 문제도 짚고 있으며, 과연 화를 참는 것이 좋을지, 터뜨려야 좋을지, 노년은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이 책은 “10대를 위한” 책이다!), 결혼은 과연 해야 하는 것인지와 같은 개인적인 문제(실제로는 역시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진다)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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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런 철학적 문제를 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지 않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약간의 의도가 엿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글을 읽고, 나아가 언급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데 방해가 될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까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어떤 철학의 습득이 아니라 철학하는 태도, 토론하는 태도, 그러니까 어떤 견해에 대해 자신의 근거를 찾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한 책들을 10대 청소년들이 그 바쁜 와중에 모두, 아니 몇 권이라도 읽을 수 있을 거라곤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아마 저자 박균호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여기에 제시한 문제 가운데 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한 권만이라도, 아니 뒤에 제시한 더 읽을거리에서 조금 더 말랑말랑한 책을 읽더라도 그 10대의 삶은 풍부해지리라 생각한다. 그게 10대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저자 박균호가 노리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라 넘겨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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