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렘은 타당하다

이재경, 『설레는 오브제』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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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보이는 사물의 이면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늘 흥미롭다. 늘 관심 속에 있었던 물건인 경우도 있지만,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던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을 추궁하고, 그 사연이 확장되어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간다. 내 주변의 사물들이 달리 보이고, 그것들이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돌이켜보게 된다. 말하자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조금은 주체적 읽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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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의 『설레는 오브제』를 펴면서 나도 설랬다. ‘오브제’라는 말부터 그랬다. 그냥 ‘사물’이나 ‘물건’이 아니라 ‘오브제’니까. 뭔가 낯선 느낌, 뭔가 생경한 느낌. 어쩌면 뻔한 것에 ‘오브제’라는, 이제는 상투적인 외래어를 제목에 썼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만도 하지만, ‘설레는’이라는 수식어가 그 느낌을 싹 가져가 버렸다. 나도 설레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놀랍게도 이재경을 설레게 하는 오브제, 그러니까 사물들은, 그녀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는 정말 ‘오브제’라는 느낌 그대로다.


나는 그런 의자를 팔러 체어라 부르는지 몰랐고, 그래서 팔리 체어라고 했을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랐다. 뱅커스 램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을 보고서야 무척이나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식이다. 낯익으면서도 그것을 부르는 이름, 그것이 가지는 효용 등에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 그런 것들이다. 꿀뜨개도 그렇고, 깅엄체크도 그렇다. 허니콤 볼 역시 그것을 보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의 이름을 알아볼 생각을 전혀 해본 적도 없다(그러니 내가 뭐라 불러본 적도 없다). 그런 문양을 ‘플뢰르 드 리스’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었고(그것이 무슨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는 미셸 파스투로를 통해 조금은 알고 있지만), 또 그런 표식을 ‘컴퍼스 로즈’라고 부르는지도 몰랐다. 드림캐처는 어떻고, 아티초크는 어떤가. 낯익으면서도 실제로는 낯이 선 이 물건들, 오브제들이다. 그러니 그것들의 이면과 그것들에 대한 생각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알던 것이면서, 실제로는 몰랐던 것이다. 저자의 경험도 보편적이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무척이나 특수한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도 있다. 봉지와 봉투의 차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고, 봉지를 ‘발명’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상상도 해보지 않았었다. 텀블러가 원래 커피보다는 술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는 것(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여전히 내 책상에 놓여 있으면서 가끔씩 사용하게 되는 페이퍼 나이프가 그렇게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 쥘부채가 추파의 도구였다는 것, 스콘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 혹은 지역에 따라 먹는 방법이 달랐다는 점. 그런 것들은 그냥 있었던 것일 뿐인데, 이재경의 생각을 통해서 그것의 의미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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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갖 사물 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물들에는 역사가 있다. 역사는 사물의 역사이기도 하고, 또 그 사물과 얽힌 사회와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사연은 늘 확장된다. 확장은 새로운 만남을 향한다. 새로운 만남은 설레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 설렘은 타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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