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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 May 11. 2018

[나침반을 잃다.]

움직이는 북극성

친구가 왔다.



좋아하는 시인 기형도. 기형도는 만 2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인은 뇌졸중.




엄마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갑자기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어."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훈성이가 왔다. 서울서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40대 중반, 나와는 중고등학교 같은 반친구이다. 35년지기쯤 되었을까. 서울서 내가 사는곳까지 차를 몰고 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닐진대, 나로서는 황송하고 고마운 발걸음이라는 생각에 어찌 대접을 해줘야하나 하는 작은 마음의 부담도 있었다.

"아이구, 너 사는곳이 서울에서 멀다야. 내가 오전 11시에 출발했는데, 쉬엄쉬엄 휴게소에 쉬다가 도착하니 저녁 6시네 관우야. 이렇게 먼 줄 모르고 출발했어. 휴~. 사실은 내가 몇년간 운전을 못했거든. 이유는 나중에 말할게. 아내가 늘상 운전하고 했는데, 이제 내가 좀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시험해보려고 너도 보고싶고 해서 내려왔다. 휴~ 멀다야."


 나이가 들수록 좀 더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고, 막 대하지 말아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비슷한 환자를 대하는 직업을 가진 친구라서 내게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기에 허 없는 벗이다.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진료실력을 높이고 개원한 훈성이. 늘 모범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성실한 친구라서, 그러면서도 "할 것은 다 하면서 사는" 훈성이와의 오랜만의 만남은 단조로운 나의 일상에 큰 화두를 던져주었다.




  훈성이는 5년쯤 전에 내과를 개원했다. 심약하고 여린 의사에게 개원은 큰 스트레스이다. 개원후 초기 몇년동안은 다들 힘든 시간을 거친다. 잘 적응하는 단단한 멘탈들도 있을것이고, 바삭바삭 부스러지는 유리멘탈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의사의 경우,  숱한 환자를 테크닉 좋게 치료한 경험이 많지만, 아직은 눈높이가 높은 환자들의 서비스적 요구까지 충족시키기에는 힘에 버겁다.  찌르는 듯한 환자의 불만을 능숙하게 소화해내기에는 마음에 굳은 살이 덜 생긴 이들이 대부분이다.


 초보개원의라면 누구라도 힘 들 그 때, 역시 그도 힘들었다고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 언제나 너무 이르다고 느낄게 될.


"관우야, 처음 개원 후에, 견디기 어려운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진료를 보는데, 어느날 하루는  갑자기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어. 그러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양쪽 다리끝에 마비가 오더라구. 마치 남의 다리가 된것처럼 말이야.  그 때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지. 119 응급콜을 했어. 서둘러 일어나서 걸으려는데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어. 어.. 내 몸이 왜 이러지.. 기다리는 환자분들은 어쩌나..   

 그러고는 아내가 왔고, 수술실로 향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겁이나서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수술동의서에 싸인을 못하는거야. 겁이 낫겠지. 나는 눈은 떠있고, 말은 언어중추가 고장나기 시작하면서 발음이 안되는 상황이라서 손짓으로 얼른 싸인을 하라고 다그쳤어. 그러고는 원인을 찾지 못해서 MRI 촬영을 했지. 뇌혈관이 막혔더라구. 중환자실에 누워있었어. 뇌혈관은 잘 터져서 터지면 신경외과의사가 바로 수술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어.

 시간이 지나, 내 대소변을 간호사들이 받아내고, 나는 중환자실의 2주일동안 침대위에 마네킹처럼 누워서 계속 울었던 기억밖에 안나. 귀를 적시는 내 눈물이 멈춘 적이 없었던거 같아. 내 인생에서 가장 싫었던 기억이야. 남이 내 대변을 받아낸다는 사실은..  잠들지 않으면 울었지. 눈물이 멈추면 다시 수면제를 주사했는지 또 잠들곤 했어.

  내 초등학생인 아이들 둘이,

 내 병상 옆에 면회시간이면 쭈뼛쭈뼛 멀거니 서서,

 '아빠 우는거 처음본다.

아빠 왜 못 움직여?'

 하는 말을 하는 걸 나는 천정을 보면서 들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지. 아내도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내 옆에서 매일 울기만하고..

 짐이 되면서 살아있을 수는 없잖아. 가족들에게 정말 큰 짐이 되긴 싫었어. 어떤 방식으로 죽을까..  어떻게 죽는게 아이들에게 상처도 적고, 나도 편하게 죽을까만 궁리했어.  중환자실에 누워 내  옆에서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환자들의 숫자를 세며 누워있었어. 내가 의식이 있을때는, 중환자실 간호사나 의사분들이 '여기 내과의사분이 누워계시니 모든 프로토콜을 좀 더 원칙적으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나를 좀 더 의식하는 것을 느꼈어. 중요한 처치들을 잘 하는지 유심히 나도 지켜봤어. 내가 숨이 멎어가면 받아야 할 처치니까.

  식물인간처럼 온종일 누워서 생각한 것은,


 타지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네 가족과 식사를 하면 좋겠다. 참 좋겠다. 그동안 소홀하고 당연히 여겼던 무뚝뚝한 내 부모님과 한번 다시 식사를 하면 좋겠다. 과묵하신 아버지와 함께 다정한 식사를 하면 좋겠다. 하는 거였어.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못해준것이 뼈에 사무치게 후회스러웠어. 누워서 종일 그런 생각들 뿐이었지.


이젠 매일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와도 더 다정하게 아이들 앞에서 지내고 있어."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훈성이는 회복되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나를 찾아왔다. 인생의 나침반을 그 순간 잃어버리고, 삶의 북극성도 위치가 바뀔수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나에게 답을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답을 알 리없다.


"진료시간도 이제 대폭 줄인지 몇년 되었고, 건강을 위해서 PT도 항상하고, 담배도 끊고, 피아노도 배우고, 작곡도 배우고, 가족여행, 가족식사가 많아졌고, 아내에게 더욱 잘하게 되었어. 그렇게 주변사람들에게 더 많이 표현하게 되었지. 관우 너도 너가 행복한 일을 찾아서 하면 그게 제일 좋은 자식교육이고 삶이 아닐까하고 나는 내가 느낀 점을 말하고 싶다. 돈이나, 명예나, 다른 사람의 평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세상을 보는 잣대들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시작되었고, '과연 중요한게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는 시간이 시작되었어. 너라면 좋은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도 먼 길을 내려왔다."

20년만에 훈성이가 거나하게 취했다.



  

훈성이가 반복해서 내게 한 말은,

"너가 지금 말하는 그건 인생에서 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였다. 나는 훈성이를 존중하기때문에 그 말에 대한 저항이 반감은 전혀없었고, 내 스스로도 다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지? 애초에 인생에 더 중요한 것이란 없는 것일까? 한편 생각해보면, 훈성이가 중환자실 침대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천정을 보며 지냈던 그 순간, 삶이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하며 떠올린 아쉬움들이 인생에서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아닐까.


훈성이의 뇌가 일부 손상되어 더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은 아닐까? 뇌졸중 환자의 후유증으로 가끔 나타나는 좀 더 이기적으로 변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훈성이가 떠난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더 주변인에게 잘하게 되었다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듯 하다.


"처음에는 발음이 안되어서 너무 힘들었어. 언어쪽 뇌에 좀 이상이 생겼던 것 같아. 내가 환자랑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말이 어눌해져서 발음이 이상한거야. 의사가 내게 평생 자전거는 타지 못할거라고 말했어. 혀에 힘을 꽉 주고 말하기를 한참 연습하고나서야 지금처럼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지. 지금은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해. 정말로."


 만일,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엔딩크렛딧이 올라온다면 관객은 황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도 예고없이 이야기의 초중반부에 갑자기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 한 편의 영화처럼 된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신병적으로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나는 블로그에 300여개의 글을 쓰고 또 쓰고 있다. 내가 삶에서 하지 못한 말을 내 자식과 가족에게 남겨주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훈성이의 말로는 '그것도 중요치 않아.'라고 한다.)

인생의 엔딩 크레딧은 꼭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정전이 되듯. 그렇게 올라온다.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죽음은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알려주는 경고장이다. 그 경고장을 받고 사경을 헤메이다 기적처럼 살아돌아온 훈성이를 어제 만났다.


사막에서 갈 곳 몰라하는 내게,


"같이 길을 찾아보자"


고 말한다. 참으로 감사하다. 감사한 일이다.


자신의 일생에서 검은 페이지를 열어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이란 쉽지 않은 것이다. 흔쾌히 털어놓을 대상이 있는 훈성이도, 나도 서로에게 고마울 일이다.  그 타인이 용기내어 보여준 상처난 페이지의 내용을 쉽게 잊어서는 안된다. 훈성이의 이야기는 아마도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등대가 될 것 같아 이 브런치에 심어놓는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이 글이 만개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각자의 오늘을 더 소중히 가꾸면 좋겠다.


 마치 연못위 얼음에 발을 내딛 듯 한걸음 한걸음의 평범한 하루하루에 감사함과 소중함을 스스로 자각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낭비하지 말아야한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바라지는 않지만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내가  중환자실에 눕는 날,
 훈성이가 흘린 눈물과 같은 흘리지 않도록 
나는 나의 새로운 북극성을 찾아야 할 일이다.


 29세의 나이로 타계한 시인 기형도를 쓰러뜨린 뇌졸중,


 그리고 나의 친구를 쓰러뜨린 뇌졸중.


 나는 여기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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