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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동규 Feb 12. 2024

오! 이렇게나


! 내가 렇게나 작다니!


안녕하세요,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덧 세 학기를 마치고 논문 작성을 앞두고 있는데요,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약하고 간사한 것 같습니다. 수업을 듣고 배우면서는 얼른 논문을 써 졸업하고 싶더니 막상 때가 되니까 하루가 아쉬운 지경입니다. 아직 방학이긴 하지만 2월도 반이나 갔는데 아직 제 논문의 주제와 연구 방법을 정하지 못했거든요. 아아, 제가 게으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학원에 입학할 즈음부터 고민하며 심혈을 기울인 제 연구 계획이 지난 학기말 발표와 동시에 반려되었고, 학과 교수님들의 조언을 듣고 새로 정한 주제는 그 주제대로 보이는 막막한 지점들이 많다 보니 좀 지치고 방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이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희소한 사례라는 점에서 그 발전 과정을 배운 게 제 관심사와 영 동떨어진 것도 아니긴 하겠습니다만, 저는 한국학과에 있으면서도 실상 세계 빈곤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세계에 만연한 '절대적 빈곤'의 퇴치와 극심한 불평등의 완화에 기여하고 싶었거든요. 어느덧 일을 하며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선·후배, 동료, 친구들을 애써 돌아보지 않으려 하면서 이런 목표를 향해 공부해온 건 제가 착하다거나 이타적이어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의 모범으로서 사도신경이,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직접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느 그리스도인이 그럴 것처럼 이 두 가지를 잘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예배 때마다 입술로 외우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배고픔이란 걸 모르는 저는, 외운대로 ”오늘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마다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예, 쉽게는 운이 좋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다 언젠가 감사함도 아닌 그 알량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럽고 미워졌을 때, 그러면 정말 하루의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역량을 갖추고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될 때 모두는 아니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 간절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 않을까요? 제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당신께서 최선으로 여기시는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물며 당신께서 직접 일러주신 기도의 내용을 어찌 외면하고 계시겠습니까. 저는, 그들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이실 때에 일부나마 제 삶을 통하여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름 확고하게 뜻을 세우고 시작하였건만 공부를 하면서 제게 가장 많이 찾아오는 생각이란 '과연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있는가'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다루려는 문제는 너무도 크고 복잡한 것이어서 배우면 배울수록 더 공부할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가 부족하고 많이 작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저는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게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거나 사명을 주신다고 할 때 그걸 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신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많이 착잡했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돌아볼 때 저 자신이 제가 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계기가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지치고 방황하게 될 때 기록하여 남겨두겠노라 마음 먹었었는데, 그게 오늘인가 싶습니다.


작년 가을의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여느 일요일에 그런 것처럼 저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저와 해외 선교를 같이 다녀온 강도사님께서 아직 전도사일 때 마지막으로 말씀 설교하던 날이었습니다. 조금 서운해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그날 설교 말씀이 잘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당시 전도사님께서 봉헌 기도할 때 언급하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손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다가 한순간 제 자신이 떡과 물고기가 된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다섯'이나 '둘'과 같은 한계 안에 있고 그 한계 안에 있는 제 자신의 작음을 볼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한계를 개의치 않으시고 뜻하신 바, 계획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신뢰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둘'도 되지 못한 '하나'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좌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저는 제 자신이 '둘'이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나아가 '다섯' 아니 '열'이 되기까지도 노력하여야겠지만 제 준거가 되는 것은 '다섯'과 '둘'로도 '오천'을 이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크심이라는 걸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언젠가 저의 쓰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받고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될 것도 믿습니다.


! 주께서 렇게나 크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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