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멀어지다

어디에 있더라도 꼭 안녕하기를 바랄게

by 권권우
시절인연-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


시절인연이란, 모든 일은 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의미의 용어이지만 탕웨이가 출연한 동명의 2014년 영화 때문인지, 요즘은 그 개념이 인간관계와 연관되어 쓰이는 게 보편적인 것 같다. 모든 일에 다 정해진 때가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그렇다나.


대학에 들어온 뒤 내 주변 사람들은 급격히 교체가 됐고 동시에 엄청나게 많아졌다. 덕분에 스무 살, 스물한 살은 (비록 중간에 코로나의 습격이 있긴 했지만) 꽤나 정신없었고 나름 활기찼다. 이런저런 일로 상처도 좀 받았지만 딱히 심각한 건 없었고.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 또 새로운 변화를 느꼈다. 그때보다 점진적이지만 더 치명적인 변화를. 스무 살 그때보다 훨씬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갈 것 같다. 무슨 사건이 생긴 건 아니었다. 나를 관통하고 있던 시기가 사건이라면 사건이지. 대학생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여있던 내 사람들이 점점 각자의 신분으로 갈라져 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의 오래된 인연들 역시 점점 더 바래지는 느낌도 같이 들었다.


오랜 친구라는 이유로, 학창 시절 만난 친구는 성인 돼서 만난 친구와는 다르다는 통념 때문에, 억지로 인연을 이어가보려 했다. 원래 나는 친구가 많은 사람도 아니니까, 관계를 오래 이어온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기도 하고.


하지만 같이 있거나 대화를 할 때 더 이상 즐겁지도 않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너는 잘 지내냐는 나의 연락에 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나는 조금씩 그것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졌다. 이제는 서운함마저 느껴지지 않던 그때, 어쩌면 여기까지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확신으로 변하기 마련이지.


나는 인연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함께했던 시간의 크기보다 함께했던 시간이 어땠는지가 중요하고 좋았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결코 쉽게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계산적인 관계가 너무 싫다. 나는 이만큼 너에게 줬으니 너도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사람들에게 베푼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사였고 오직 나를 위한 일이었다. 내가 주고 싶은 만큼 줬다. 그러니까 끝내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


어떤 이유가 됐건 더 이상 당신이 좋지 않다면, 당신이 누구건 그만할 준비가 되어있다. 소리 지르고 분노하며 잘라내진 않겠지만 다신 먼저 당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가능성 정도는 열어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으니.


원망하지 않지만 조금은 미워한다. 과거에 빠져있진 않지만 가끔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시절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때는 분명 소중했었다. 끝까지 가져가지 못했다고 추억마저 악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추억 속에는 미운 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도 자리하고 있으니.


아직까지도 곁에 있다면 더 좋았겠다. 그 시절에 좋았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함께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조용히 멀어지고 싶다.


우리는 전부 다르다. 너와 나는 죽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나 다른 서로를 그럼에도 이해하려 하는 행위를 사람들은 우정이나 사랑이라고 부른다. 누군갈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그게 바로 '남'이 되어가는 과정이겠지.


여기까지가 군대를 다녀온 직후, 약 3년 전에 느낀 부분이다. 이제는 나 역시도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사실상 벗어난 상태이다. 그때 떠나보낸 사람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그랬다가 다시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계속 인연이 유지될 거라 믿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남이 된 사람도 있다. 이제 막 알게 됐지만 어느새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한 사람들도 있고. 그때는 한 번 소원해지면 돌이킬 수 없다고 믿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과 오래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너무 소중하게 여긴 사람을 이유도 모르고 멀리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큰 일이라는 사실이다. 양쪽 모두의 노력이 필수적이지만 노력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 없는 외부적인 상황 혹은 운 같은 것이 따라주지 않으면 원치 않아도 멀어진다는 걸 알았다.

처음 이것을 느꼈을 땐 마음이 아팠다.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없는데 멀어진다는 것이 정말 잔인하다고 느꼈다. 다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언제든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 신중한 것은 좋지만 과해지면 행동으로 이어지질 않는다. 근데 머리론 알겠는데 마음까지도 편안해지지는 않네. 진짜 이대로 멀어지는 거야?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사실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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