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제작진에도 출연진에도 아는 사람이 살짝 껴있어서 오픈한 첫날 가벼운 마음으로 응원하듯 켰다가, 순식간에 공개된 4회까지 달렸다. 바로 다음 날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하고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이야기가 넘실대는 걸 보니 다들 비슷하게 느꼈나 보다. 오랜만에 메가히트 예능이 나오는 느낌인데, 사실 난 요리예능은 잘 모르고, 보는 것도 보통 다들 보는 정도밖에 못 봤지만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는 느껴진다.
내가 만약 저 소재로 예능을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공부하고 모니터해야 할 것 같은 프로그램의 리스트를 쭉 떠올려 봤다. 대강의 지식이나, 편집 스타일을 참고하기 위해서 보면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보니 혀를 내두를 만큼 많더라. 이 프로그램은 그런 과정을 충분히 거친 것 같았다. 서바이벌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요리 프로가 보여주어야 하는 요소들을 고루 보여준다. 편집에 낭비가 없고, 그림을 따기 위한 인서트용 요리를 다시 할 수 있는 시간이 안 되는 세팅인 것이 보이는 데도 앵글이나 인서트가 꾸준히 안정적이다. 저 규모의 촬영에서 모든 요소가 (편집상으로라도) 물 흐르듯 안정적이라는 것은 프로덕션의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여준다. 난 못 한다. 절레절레.
방송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아마 평가의 공정성이라든지, 요리 환경이나 재료 구비에 대해 저 까다로운 요리사들이 원하는 바를 온전히 충족시켜 주진 못 했을 거다. 서울에서 방문할 수 있는 유수의 식당들이 많으니, 직접 가보면 출연한 셰프들의 푸념이나 불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왕왕 있겠지.
그럼에도 꼼꼼함이 느껴지는 것은, 매 요리마다 지나치게 불완전한 세팅을 던져주며 "그것도 실력"이라고 밀어붙이기보다는 각자가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 사실 서바이벌이나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이런 '그것도 실력'이라는 식의 장면을 보여줄 때가 많은데, 대부분 제작상의 여건이 그 정도밖에 안 나와서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가만 보면 오븐 등의 조리 도구가 겹치지 않도록 동시에 요리하는 숫자의 사람만큼 준비해 준 것이 보이고, 요리 재료가 미션으로 주어졌을 때 각 출연자가 메뉴를 고민하고 필요한 자재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해 준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저 식자재 값으로 제작비의 상당 금액이 쓰였을 것이다.) 보통의 예능이라면 이렇게 메뉴를 고민하고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들도 따라가 찍으면서 분량을 확보할 텐데(물론 나름의 재미도 있다), 편집은 정말 '대결'과 '요리'에 집중하기 위해 그 모든 과정을 날려 버린다.
게다가 대규모로 동시에 진행하다 보면 분명 순서가 꼬이거나 밀리는 일도 있을 것이고, 그럼 요리가 식어버려 심사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구운 고기나 '바쓰' 같은 음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식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장의 진행과 구성을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80명의 요리사 중에서 20명을 뽑는 과정을 40명씩 나눠 진행하되 편집상으로는 그 구분을 지워버렸다든지, 2라운드의 '흑백 대결'은 동시에 7팀씩 14명이 요리하는데 시작하는 시간을 10분 간격 릴레이로 구성했다든지 하는 장치들이 그렇다. 출연자들의 컨디션과 촬영시간, 요리의 질을 모두 고려하기 위한 구성이다.
'요리가 중요하지!', '촬영을 세심하게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대결을 하나하나 진행했다면 일정이나 예산, 출연자들의 컨디션 어느 것 하나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장면 한 장면 회의실에서 제작진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가 느껴진다.
사실 이 모든 것도 넷플릭스쯤 되는 클라이언트의 거대한 제작비가 있으니까 구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제작비를 낭비 없이 정확하게 목표한 효과를 내는데 썼다는 게 보여서 좋다. 매번 돈을 들인 구성이 그 값을 한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요즘 OTT 예능을 보고 있으면 '와 저거 하나 뽑으려고 저 돈을 들였어?' 싶어서 아까운 장면들을 자주 만나니까. 큰돈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며 쓰인 작품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이런 '형식' 말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고민이 느껴진다. '먹방', '쿡방'은 이런 말이 생기기도 전부터 방송의 단골 소재였다. 하지만 요리는 오감을 다 쓰고, 그중에서도 맛, 향, 식감이 절대적인데 딱 이걸 전달할 수 없는 시청각 매체인 영상으로 이를 다루는 연출자들은 나머지 감각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오랜 세월 늘 고민해 왔다. (맛집 예능에서 능숙한 방송인들이 자꾸 '맛표현'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검증된 방식은 질감이 느껴지는 섬세한 클로즈업 인서트컷, 그리고 식감을 상상하게 하는 선명한 소리(튀기는 소리, 바삭한 씹는 소리 등등) 같은 것들이다.
<흑백요리사>의 2라운드는 '주재료'라는 구성으로 이 영역을 다룬다. 묵은지, 장, 오겹살, 들기름 같은 재료들은 한국 시청자라면 대부분 한 번쯤 먹어본, 강한 맛과 향을 지닌 재료들이다. 때문에 그림으로 보고 설명만 들어도 무슨 맛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먹어본 적도 없는 제비집이나 푸아그라, 베이징덕(...) 같은 재료들이 등장하는 요리 프로가 아닌 것이다.
서바이벌로서도 능숙한 면모가 보인다. 서바이벌, 즉 대결장르는 일본식 '소년만화'가 긴 세월 발전시켜 왔는데, 특히나 이런 '천하제일대회'에서는 그런 만화적 감각을 능숙하게 활용할수록 몰입감을 높인다. 얼마 전 <더 인플루언서>의 1라운드 보면서도 토가시 요시히로ㅡ헌터X헌터ㅡ의 만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팔 여럿 달린 여자, 섹시한 여자, 근육질 남자, 드랙퀸, 작은 소녀, 평범한 소년, 무표정한 정장남이 그림체 통일 없이 마구 그려져 있는데 여기서 강자는 소년, 소녀, 정장남인 것이 공식이다.)
<흑백요리사>는 좀 더 정공법의 소년만화에 가깝다. 심지어 비주얼도 허허실실 인상 좋은 고수 할아버지부터, 정석의 엄격한 거장 노인, 비장의 실눈캐, 그린 듯 선한 인상의 아주머니, 외국인, 분석적인 안경 실력자까지 일부러 만화적으로 뽑았나 싶을 만큼 딱 들어맞는다. 매칭의 서사도 하늘이 도운 것처럼 훌륭하고(편집도 잘 살렸지만), 대결하는 음식들의 비주얼 대비도 흥미롭다. (모니터룸에서 제작진이 환호성을 질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여럿 있지만, 실제로 이런 대규모 촬영을 할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현장에선 몰랐다가 편집실에서 알게 된 것도 많았을 것이다.)
1라운드에서 백수저 요리사들이 2층에서 참관하는 구성도 영리하다. 굳이 관찰 패널을 쓰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설명 오디오를 뽑는다. 근데 이것도 전형적인 소년 만화 속 '천하제일대회' 연출 방식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소년 만화에서 이 역할을 하는 건 주로 '전투력 측정기'라고 불리는 상대적으로 약한 조연들인데, 여기서는 4천왕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정도...?
"요리가 많이 늘었네" 같은 대사는 서사를 더 만들고 싶은 욕심도 들었을 텐데, 프로그램 톤을 고민하며 심플하게 넘어간 건 좀 아쉬웠다. 난 울컥했는데. 근데 그랬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처음 틀었다가 내리 4편을 모처럼 빈지워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일이 드라마 다 만들어 줬으면 점도가 너무 높았겠지.
모처럼 너무 잘 봤다. 다음 주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