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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Feb 29. 2024

아시아 화교 이야기

14. 중국 중원(中原), 허난성(河南省)의 정저우(鄭州)     

나의 다른 중국인 친구는 내가 허난(河南)을 간다는 것을 알고 충고를 한다. "중국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출신지역 사람들이 어딘 줄 아세요? 허난 사람들이에요." "그게 무슨?" "뒷 통수 치고, 속여먹고, 아무튼 중국의 수많은 지역 사람 중에 허난 사람은 신뢰 안 해요. 조심하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  이건 뭐야?  중국의 지역감정이네?.'

사실 그런 류의 지역감정을 수반하는  언급은 중상(中傷,  slendering)이다. 그러나 자꾸 그런 중상이 일반화되면 고착화될 수도 있다. 인간의 굴레(trapped by  human bondage 필자의 英譯) 중에 하나이다. 정치(政治)하는 자 들이 그런 인간의 굴레를 이용한다. 멀쩡한 거짓도 계속하면  인간들은 그 거짓을 믿는다. 인간 개체뿐만 아니라  인간 대중(大衆)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왜 그런 루머가 있느냐하고 분석적 생각을 해보면 어떤 배경이 있다.

허난!

그곳은 근세에 들어와서 대기근(大飢饉)을 심하게 겪은 곳이다. '허난의 대기근'은 중국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재앙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시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장제스(張介石)군이 허난에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에게 밀린 장제스는 황허의 제방을 무너뜨려 일본군지역을  침수시켰다. 그런데 제방을 미쳐 복구도 못한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홍수가 났다.

제방이 무너진 허난평야는 무방비가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하여 수만 명이 사망했고 경작지는 반으로 줄었다. 그러한 고초를 겪고 있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1942년 극심한 가뭄이 들어  먹을 식량뿐만 아니라 풀뿌리조차도 귀해졌다. 게다가 메뚜기떼의 기습까지도 받았다.

단 1년 사이에 300만 명이 아사(餓死)했고 이재민이 1,200만 명에  달했다. 허난은 최악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으로 변했다. 장제스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구휼(救恤)은커녕 외부에 알려질까 봐  숨기기에  급급했다. 희망을 잃은 주민들은 일본군에 협력하기 조차 했다.

그 후의 국공내전(國共內戰) 시에 허난성 주민들은 당연히 공산당 마오쩌퉁을 지지했다.

대기근이 끝나고 70년이 흘렀어도  허난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기도 했고 영화화되기도 했던 허삼관 매혈기(許三觀賣血記)에 허삼관이 피를 팔아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처럼 허난의  빈곤한 농민들이 피를 팔았는데 1990년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집단 에이즈 감염을 유발했다. (허삼관 매혈기의 배경은 베이징이지만.)

하여튼 이래 저래 허난성 사람들에  대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이 심각한 지역차별을 하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허난의 젊은이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갔다. 그리고  출신지를 숨기면서 산다.

물론 차별받는 것이 두려워서 일 것이다. 지금 내 이야기의 주인공 짜오도 그렇게 고향을 떠난 허난의 젊은이다. 그는 자기 얘기를 되도록 안 하고 있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난해서 공부를 못 했다는  얘기는 그가 직접 말했었고 무엇인지 자꾸 과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열등감을 표출하는 심리로  보인다.

홍콩에서 국내선으로 바꾸어 타고 내린  허난의 주도인 정저우(鄭州)는 미세먼지로 유명한 시안(西安)이 멀지 않아서 그런지 어둡다고 느낄만치 음습한 공기에 쌓여 있었다.

짜오가 나한테 제안한 것은 허난의 어떤 지역에  친구들 몇 명과 함께 투자하여 세우는 알루미늄 압출공장이 있는데 준공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한다. 나를  공장으로  안내하여 기술적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투자지분의 몇 퍼센트를 주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나에게 실제적인 현금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서류상으로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물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잊지 필요한가 하고?

그가 말하기를, 외국인이  투자하는 법인은 금융상의 특혜와 세제상의 특혜가  있어 대출도 용이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계사나 변호사한테 의뢰해서 잘 알아봐.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기술적인 점검은 내가 잘 봐줄 수 있어."

중국이 그렇게 호락호락 외국인에게 특혜를  주는 나라가 아닌 것을 아는 나는 그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 짜오가 와서 기다리는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짜오가 혼자 올리 없다. 늘 누군가를 대동하고 다닌다. 짜오와 같이 온 서너 명의 친구들은 짜오의 고향 친구들일 것이고  딱 봐도 시골 출신 젊은이들이다. 한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호텔로비에서부터 피우던 담배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물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간 식당의 1층 넓은 홀은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사람들이 붐빈다.

홀에 세팅되어 있는 식탁은 모두가 원탁의 테이블인데 모든 식탁이 빈자리 없이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고  중국인 특유의 소란스러움 역시 홀을 꽉 채우고 있다. 거기에 그릇 부딧치는 소리, 종업원들이 그릇을 나르며 외치는 소리가 더하여져 정신이 없다. 식탁의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큰 사발의 국수를 먹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식당은  국수 전문의 대중식당인 듯 싶다. 우리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소음에서 도망치듯이 부리나케 올라갔다.

이층에 마련된 방에는 또 다른 짜오의 친구와  아주머니 한 사람과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짜오가 자기 누이라고 나에게 소개했다. 어린아이는 조카아이이다.

짜오의 누이는 농사일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 햇볕에 그을려 있는 시골 아낙이다.

친누나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짜오를 어려워하는 눈치이다. 우리도 둥근 식탁을  꽉 채운 인원이 되었다. 짜오는 모든 사람들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종업원을 불러 과할 만큼의 많은 메뉴를 주문하면서  대중을 주도한다. 외지에 나가  성공하고 돌아온 자의 으스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고 모두가 이를 인정하고 기꺼이 따라 준다.

짜오는  지갑을 열어 붉은색 지폐 100위안 두장을 조카아이한테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준다. 또 한참 지껄이다가 지폐 두장을 꺼내 누이한테 주었다.

내가 만약에  우리 누나한테 돈을 준다면 미리 봉투에 넣어 두었다가 남들이 안 보는데서 은밀히 주는 방식을 택 하거나 은행을 통하여 송금을 할 텐데 짜오는 만인이 보는 자리에서 자선이나 베푸는 듯 용돈을 준다. 그것도 애들한테나 줄 소액을! 그들 사이에 무슨 역사적인 스토리가 있는지는 내가 알턱이 없으니  함부로 얘기할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짜오가 자기 누나한테 애틋한 정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누나도 동생한테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세가 매우 낮다. 너무 가난했던 그들의 과거에 무슨 한을 서로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친누나를 만나려면 조용히  따로 만나 형제의 정을 나눌 일이지 친구들과  외국인 손님을 대동하고 같이 만나는 경우는 무엇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 할 일이다. 보통 누나라면 단박에 "망할 놈"하고  욕을 바가지로 내 질렀을 것이다. 나는 무엇인지 자리가 불편하여 일어나고 싶은 것을 참고 앉아 있었다.

잡다한 메뉴들의 끝에 일층 홀에서 본 사발국수가 나왔다. 사람 수대로 가져온 국수 한 사발의 양은 서너 명이 먹어도 될 양이다. 요리들로 이미 배를 채워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웬 국수 한 사발? 우리의 칼국수 정도 굵기의 면발인데 맛이 있다고 칭송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우리 칼국수에는 밍밍한 밀가루 국수발을 도와 애호박, 감자등을 곁들이고 국물에 맛을 내기 위하여 멸치나 조개를 우려내는데, 그것도 부족하여 양념을 한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맛을 더한다. 이곳 허난의 국수는 그냥  양(量) 떼기다. 가난했던 이곳  지방의 음식문화를 잘 보여주는 메뉴인가 싶다. 다음날  아침 짜오가 와서 나를 태우고 궁이(巩义)라는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와 만날 사람과 약속을  잡아 놓았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도로공사에 납품할 쇄석(碎石)을 생산할 크라샤 플랜트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대로 플랜트 제작사를 방문하는 일과 나머지는 그가 나한테 소개하고자 하는 알루미늄 빌레트 제조사이다.

쿵이는 정저우와 서쪽 뤄양(洛陽)의 중간에 있는 소 도시다. 뤄양의 언급이 나온 김에 허난성에 있는 고도(古都) 얘기를  해보자.

중국의 7대 고도로 알려진 곳은 다음과 같다.

난징(南京), 뤄양(洛陽), 베이징(北京), 시안(西安), 안양(安陽), 카이펑(開封), 항저우(抗州).

그중에 3개 고도가 허난에 있다. 뤄양, 안양, 카이펑이다.

허난을 중원(中原)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왕조가 흥과 망을 되풀이하던 역사에서 그  중심은 언제나 중원이었다.

삼국지에서  동탁(董卓)과  여포(呂布),  그리고 조조(曹操)가 패권을 각축하던 낙양, 무협지에서의  북송(北宋)의 협객들, 그리고 판관 포청천(包靑天) 이야기의 개봉, 그리고 소림사, 쑹산(嵩山),  등등.

궁으로 가는 고속도로에는 수많은  초록색 간판 이정표들이 안내를 하고 있는데 소림사(少林寺)라고 쓰인 글자와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앗!  소림사!"라고 속으로 외쳤다. 나도 어릴 때 무협지를 어지간히 읽었을 것을,  그 판타지 이야기의 중원에 와 있음을 저 소림사 화살표 이정표가 일깨워 준다.

궁이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중에  50달러짜리 지폐이야기가 있다.

지갑에 있는 위안화를 점검해 보니 얼마 되지 않아 가지고 있는 달러를 위안화로 바꾸려고 은행에 들렀다. 지갑의 부피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생각에 100달러짜리 지폐 대신 50달러 지폐 두장을 카운터에 여권과 함께 제시했다. 지폐를 받은 직원이 지폐를 들여다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른 누구한테 보여 주었다. 다른 누구도 또 고개를 갸웃하고 또 다른 다른 누구에게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해서 홀에 있는 모두가 몰려와서 지폐를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신기해 마지않는다. 처음 본 돈인 것 같았다. 결국 매니저라고 생각되는 윗사람이 나에게 와서 자기 은행에서는 돈을 바꾸어 줄 수없다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통보했다.

하기야  대 도시 난징(南京)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위안화로 바꾸는데  거의 3,40분쯤  걸려서 바꾸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소도시 쿵이의 작은 은행이 생전 보지도 못했던 50달러짜리를 바꾸어 주지 못하는 실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중국!

가깝고도 먼 나라. 하기야 이념 자체가 다른 사회인 것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궁이에서 접대를 받았던 점심식사는 훠궈(火锅)였다. 내가 중국  각지에서 먹어본 훠궈 중에 가장 고급으로 보이는 성찬이었다. 물론 식사자리에 온 그쪽 인원도 만만치 않은 숫자였던 것은 마찬 가지였지만. 짜오는 알루미늄 빌레트 제조회사를 나에게 소개하면서 그들과 거래를 주선하고자 했다.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짜오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점심은 크라샤 플랜트 제작사에서 냈다. 아마도 궁이 시에서 가장 비싼 메뉴였을 것이다. 궁이에서 불과 70킬로만 더 서쪽으로 가면 뤄양인 것을 알면서도 못 가본 것은 두고두고 아쉬웠던 허난의 소도시 방문이 되었다. 짜오가 투자하여 세우고 있는 알루미늄 공장은 안 가기로 했다. 같이 투자하는 친구들 간에 불협화음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어쩐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짜오와 같은 지독한 흙수저 인사가 복잡한 법인체제에 문제없이 돌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냥 열심히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이 옳은 길 같은데 짜오는 계속하여 번듯한 타이틀의 회사의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불안 불안한 마음을 같게 한다.

태국의  수십 개의 알루미늄 압출공장은 모두 짜오의 잠재적인 고객이다.

중국의 알루미늄 도시 포산(佛山)의  기계 제작업체, 소모재인 화공약품 생산업체,  금형제작업체 등과의 탄탄한 인맥은 그의 기술적 지식의 결핍,  어눌한  태국어 능력,  거래에 필요한 사무능력의 결핍,  충분치 않은 자금 능력을  뛰어넘고 있다. 또한 짜오는 접대의 남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접대비는 절대로 아끼지 않는다. 그가 주로 이용하는 태국 쪽의  접대처는 진(陳) 씨네 셋째가 운영하는 고급 마사지 숍이다.

셋째는 한때 다섯 개의 숍을 운영했었는데  현재는 세 개만 남기고 두 개는 정리했다.

본점(本店)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어의 이름인  C점은 VIP룸이 다섯 개가 있다. VIP룸은  20평 정도로 넓은 면적의 방인데  가구와 인테리어가 최고급의 것 들이다.  

고급 샹데리아의 조명은  호화로운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호화롭게 단장된 침대 방이  따로 비치되어있어  은밀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수압 마사지가 되는 자꾸 치(jacuzzi)가 구비된 목욕탕도 있다. 사용료는 시간당으로 계산하는데 한 시간 사용료가  3000밧(12만 원)이다.  음식값과 술은  따로 계산한다.

여자 서비스 마사지 걸은 시간당으로 지불하는데 급에 따라 시간당 2000(8만 원) 바트에서  8000(32만 원) 바트를  지불한다. 인원을 다섯 명으로 잡고 세 시간 정도를 식사와 술을 즐겼다  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은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금액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짜오는 매우 중요한 고객(이윤을 많이 남 켜준)이라면  여기로  모셔와 접대비를  아끼지 않는다. 내가 셋째한테 서비스 걸의 등급은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그건 뭐,  아무래도 나이가 적을수록 비싼 것 아닌가? 그리고 외양도  또한 중요하고, 최고의 등급은 학력도 중요한 요 소지. 대화가 안 되는 소양(素養)이라면 아무리 미모가 출중하더라도 최고는 될 수 없지."

'그것을 누가 심사해서 결정하고 계약을 하는가?' 하고 더  묻고 싶었지만,  그걸 알아 뭐 하게?  하는 생각으로 더 이상 그것에 관해서는 의문을 거두었다.

옛날의 태국의 그런 종류의  시설에서는  아가씨들이 유리벽 안에 번호표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고 손님들이 유리벽을 통하여 들여다보면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고른다.

지금도 격이 좀 떨어지는 그런 클럽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여기 C클럽은  더 이상 그런 설비는 없다. 소위 사교 클럽의 모양을 갖추었다. 맥주나 커피를 마시는 보통의 사교홀에 손님들 그리고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으면서 무슨 헌팅 같은 모양새를 갖추어  손님과  아가씨가 만난다. 그  클럽의  키친은  수준급 이어서 중식,  일식, 양식 모두가 가능하고 고급지다.

셋째가 가끔 나를 초대하여  일식 생선회를  대접하곤 하였는데  사업이 예전 같지 않아  근래에는 부담스럽다. 나는 태국에 들릴 때마다 짜오를 만나 적어도 한 번은 식사를 하곤 했다.

그를 만나는 곳은 정해져 있다. 방콕만의 서쪽, 사뭇사콘(Samut  Sakorn),  마하차이, 사뭇 송크람을 지나는  중요도로가 라마 투 로드인데 계속 가면 폐차부리,  차암,  후아인에 이르고 계속 열 시간 이상을 간다면  말레이시아 국경에 이르는 국도 4번 도로다.

사뭇사콘에 있는 센트랄 플라자라는 백화점에서 그를 만난다.

그는 내가  그의 사무실에  들려주기를 바란다. 자랑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가 스리랑카의 내 공장을 갔다 온 후로 내가 그의 롤 모델(role  model)이 되어 있다.

사고파는 장사만은 안 하겠다는 것이다. 거의 억지로 따라간 그의 사업장은 들어가는 길이  온통 진흙탕이다. 그 진탕을  지나니 콘크리트  벽돌로 지은 건물과  또 다른  나대지 땅이 나오는데 여기가 자기 사업장이라고 한다. 건물 한쪽 구석에 중국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철제 구조물에 산소용접을  하느라고 불똥을 튀기고 있다. 내가 짜오를 보고, "빌레트(billet)  가열로(加熱爐)네? 이제는  직접 여기서 제작을 하는구먼." 짜오가  "예.  간단한 기계류는 여기서 그냥 제작을 해요.  인력은 중국에서 데려  왔어요." 작업장 구석에 작업복,  매트레스,  그릇등의  잡다한 것들이 보인다. 언 듯 짜오의 옛 모습이 오버랩(overlap)된다.

짜오 왈, 여기 땅은  그가 샀다고 했다. 사무실 하나 달랑 가지고 수행했던 사업이 비가 조금만 뿌려도 진흙탕으로 변하는 땅이지만  에이커가  넘는 공장을 가지고 있는 사업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그가  고용한 중국 친구들은 그를 그들의 보스로 깍듯하게 대우할 것이다.

그가 되어 보고자 하는  총징리(總經理),  또는 , 라오총(老總)이란 호칭을 듣고 있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루기 버거운 광둥어를 말하는 광둥사람들은 결코 아닐 것이고 자기 고향 허난의 촌놈(?) 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가 스리랑카 우리 공장에 납품했었던 연속주조기의 치수가 안 맞아 이를 교정하기 위한  용접공을 보내와서 한 달 정도 스리랑카에서 일을 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용접공 친구는 우리 숙소에서 한국인 기술자,  태국인 기술자들과 같이 숙식을 했는데 그의  식사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는 한국식이든,  태국식이든,  스리랑카 음식이든 또는 양식이든 어떤 음식도 못 먹었다. 먹으면 그냥  토했다.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그가 잘 먹을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매 끼니를 밥과 간장으로만 먹다가 살이 쪽 빠져서 돌아갔다. 이 친구가 허난성 깡촌에서  온 친구다.

그래서 나는 너무 외국음식을 가리는 사람은 어릴 때 너무 가난하게 살았던 시골 출신인가 하고 추정한다. 아니면  도전정신이 심하게 결여된 소갈머리가 변변치 않은 성격이던가?     

     

 








15. 꾼밍(昆明) 그리고 사이먼     

  스리랑카  회사의 사장직을 내놓고 한국에 들어와 있던 2012,3년쯤,  무슨 좋은 일거리가 없을까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총무이사가 중국의 어떤 사람과 서로 교신했던 메일 파일과 도면을 나에게 가져왔다. 윈난성(雲南省)의 꾼밍(昆明)의 어떤 회사가 견적을 요청한 도면과, 사양이다. 알루미늄 압출재의 방열판(放熱板, heat sink)인데 물량이 매우 크다. 우리 직원과 오고 간 메일을 검토해 보니 그런대로 내용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중국이 그런 종류의  압출재는 우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을 터인데 왜 한국에서 수입하려고 하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어 그것에 대하여 문의를 하자, 답변이 왔다.

그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하며 그 사정 얘기는 문서로 답할  내용이 아니고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귀사의 가격은 일단 자기들 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라고도 했다. 인천공항에서  쿤밍까지의 직항로는 없어 상하이에서 갈아타면 되는데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로 가는 비행기는 거리가 얼마 안 되기도 하고 운행하는 항공편이 많기 때문에 운임이 비교적 적절하여 여행경비가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편이다. 그보다도  또 몇 년 전에 우리 가족 6명(두 아들 부부와 우리 부부)은 가족 여행으로 윈난의 리장(丽江)을 다녀왔었다.

  나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출발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쿤밍에서 만났다.

먼저 도착한 두 아들이 쿤밍 공항에 나와 나를 마중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을 예약하여 하룻밤을 한방에서 지내고 다시 항공편으로 리장으로 갔다. 중국어를  중국인으로 오인할 만큼 잘하는 둘째 며느리와  그만큼은 안되더라도 꽤 잘하는 중문과 출신 둘째 아들의 활약으로 가족 모두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만 목적지가 달라  그들을 한국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쿤밍에 홀로 남아  하루 종일을 보냈었다. 처음 온 이 도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호텔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꾼밍시의 반대편 끝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호텔까지 걸었다.

네 시간 정도 걸었는데 걷는 동안  라오쯔하오(老字号)란  호칭이 붙은  국숫집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길게 선 줄에 합류해  번호표를 받아한 그릇을 겨우 먹기도 했고, 다시 출출해진 다음 어느 식당에 들어가  주문한  양저우차오판(杨州炒饭)이 큰 대접에 고봉(高峯)을  이루어 나왔다. 대, 여섯 명이 먹어도 남을 양이었다.

라오쯔하오라는 것은 국가가 오랜 전통의 상점에 붙여주는 호칭이다. 보통 100년 이상 문을 열고 있는 상점에 붙여 주는 영예로운 등록상표라고 한다. 크기가 주먹 두 개만 한  단단한 윈난 북숭아도 몇 개 샀다. 아,  참,  잊을뻔한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휴대폰 가게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어느 상가의 한 가게에서  1400 위안이라고 가격표가 붙은 짝퉁 삼성 핸드폰을 손짓 발 짓으로 흥정을 해서 200위안에 샀다.

뭐, 흥정 이랄것도 없었다.  200위안만 들어 있는 지갑을 보여 준 게 다이다.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 어쩌랴 하는 제스처가 된 셈이다. 어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 주인이 "하오"하며  화끈한 미소와 함께 포장해서 건네준다.

200은 1400의 몇 분의 몇인가? 그 이후 중국에서 옷가지 하나 살 엄두도 못 낸다. 깎는 기술이 없는 내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 깎지 못하고 붙인 정가대로 사거나 겨우 몇 퍼센트 깎아 산다면 어찌 즐거운 쇼핑이 되겠는가? 안 사고 말지.

매번 지갑을 열어 보여주는 트릭을 계속 써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짝퉁 휴대폰 메이커가 오늘날 화웨이가 되었는지, 샤오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짝퉁 삼성 휴대폰은 엄밀히 얘기해서 삼성이 아니었다.

삼석(SAMSUG) 인가로  기억한다. 

  그 옛날 그 쿤밍을  지금 가 보려고 한다. 가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일단 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들과 약속을 잡았다.

그러려면  중국말도 못 하는 나 혼자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 중국친구와 함께 가려고 했다. 태국에 알고 지내는 또 다른 중국 친구가 있는데 그의 이름이 사이먼(Simon)이다.

헤이룽장(黑龙江) 성 출신이고 영어를 잘한다. 40대 젊은이로 중국회사 태국 법인의 마케팅부에서 일한다. 그는 아프리카의 남아공에서 일한 적도 있고 호주에서 일한 적도 있는 국제 무역의 경험이 풍부한 친구다. 우리가 앙골라에서 공사대금으로 받은 달러화를 한국으로 송금하는데 외화 반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앙골라 국가 정책 때문에 은행을 통한 정상 송금이 불가하여 개별 송금 루트를  찾아야 했다. 정치적으로 같은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중국과 베트남에  대해서는 차별적으로 완화된 정책을 펴고 있어 믿을 만한 그쪽 루트를 찾다가 태국의 사이먼과  연결이 되어 그를 몇 번 만났었다. 남아공에 근무했던 이력으로 아프리카 각국에 중국인 지인들이 많이 있기도 하거니와 아프리카의 실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그를 통한 루트를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태국에 들리면 그를 만나 식사도 같이 하면서  친구로 지냈다. 앙골라의 아파트 주택공사에  견적 금액을 제출하여야 하는데  목재 현관문의 국내 가격이 매우 높아 가격 경쟁에서 불리하리라 하는 생각이 들어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 하고 노심초사하다가 발주처가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하여튼 중국산을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 마침 태국에 들릴 일이 있어 사이먼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했다. "라이오닝의  다렌(大连)에 왕(王)이란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라면 도와 드릴 수 있겠네요.  그 친구는 건축 엔지니어예요.  제가 연락을 해 놓을 테니 다렌에 한번 가 보시죠."

그래서  다렌에 가서 왕의 도움을 받았다. 다렌을 이왕 간 김에 시내에서 한 시간이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의 뤼순 감옥에 가서 안중근  의사도 뵈었다. 그렇게 그의  신세를 진 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의  신세가  필요하여  도움을 청했다.  쿤밍에   하루나  이틀 와서 통역 겸  거래 절차 등을 좀 도와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쿤밍공항에 나보다 한두 시간  먼저 방콕에서 출발하여 온 사이먼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이 일을 담당하여 추진해 왔던 우리 회사의 이 이사와 함께 공항에서 사이먼을 만나 함께  출구로 나왔다. 이들이 출구에서 피켓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명이 늘 몰려다니는 중국인답게 네 명정도가 같이 왔는데 그중 하나는 아가씨다.

영어 통역이다. 사람 수가 많으니 두대의 차를 가져왔다.

우리가 타는 차는 BMW 7 시리즈의 고급차이다. 함박웃음으로 친절하게 환영하는 그들과의 시끌 대며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은 곧바로 꾼밍시의 어느 음식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정원이 잘 갖추어져 있는 단독 주택형 식당은 윈난의 정취를 머금고 있는 분위기의 고급 식당이다. 사이먼은 그들의 모든 이런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이룽장 출신이며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진짜 중국인, 사이먼은 중국어로 그들과 내용이 별로 없는 간단한 표현의 말은 하지만 되도록 말을 아끼고 있다.

그는  태국에 살고 있는 화교로 자기소개를 했던 것처럼  중국인임을 감추고 태국 화교로 행세를 하고 있다. 중국어보다는  통역아가씨와 영어로 소통을 한다.

작달막한 키의 통역 아가씨의 영어는 전형적 중국사람의 발음이고 과연 통역이 제대로 되는지 믿기가 어려울 정도의 실력이다. 사이먼은  통역하는 일에 일체 간여 안 하고 있다

사이먼은 점점 이들에 대한 신뢰감이 적어지는지 말 수가 거의 없어진다.

사실상 그는 공항에서 받은 명함에 있는 회사명과 전화번호 등을 남몰래 인터넷으로 검색을 끝내 놓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사기꾼이라면 위험 해 질 수도 있다.

특히 사이먼이 중국인이라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사이먼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음식이 끝도 없이 들어온다. 윈난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기회이니까 나는 이런저런 의심을 거두고 먹는 일에 전념했다. 사이먼에게 귓속말로,  "의심이 가는  일이 있더라도 티를 내지 마. 그리고 표정관리 잘해. 위험할 수도 있어."하고  경고를 했다.

사이먼도 잘 알고 있다고 하며 잘 알아서 처신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한다.

사업 이야기보다는 음식,  쿤밍의  볼거리등에 대하여 얘기를 했는데 다들 좋은 인상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고  친절함을 감추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그들  회사라고 하는 곳으로 갔다. 삐뚤빼뚤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골목길 어느 지점에 차를 세우고 유리문의 게이트를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혹 회사 이름이 있는 간판이   있을까 하여 주의 깊게  관찰을 해 보았지만 어떤 간판도 없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는데 3층쯤에서 나무 도어를 열고 들어 간 곳은 넓은 홀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무실이 아니다. 넓은 홀 한쪽에 긴 탁자가 있고 의자가 탁자를 에워싸고 가즈런히 놓여있다. 식탁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가 자기 회사의 회의실이라고 한다.

공항에서 명함을 준 주(周)라고 하는 사람이 회의를 주도하는데 중국인 특유의 형식적 인사말로  회의를 시작한다고 선언한다. 중국의 중국인은  이런 경우 깍듯한 인사치레를 결코 잊지 않는다. '오시느라고 고생 많았다.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대접이 시원치 않은 것에 용서를 바란다. 우리는 미래를 위하여 같이 최선을 다하자. 계시는 동안 안녕히 지내시기를 기원한다.'공산당의 상투적 인사는 어디를 가나 똑같다. 모르겠지만 북한도 똑같으리라. 주(周)는 우리에게 명함을 준 유일한 사람이고 주위에 따라다니는  여러 사람들은 명함도  주지 않았고 사업과 관련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냥 따라다니는 역할만 하는 것  같았고 그들 중 한두 명은 행색이 남루해 보이기조차 했다. 사실 우리 쪽의 사이먼도 그들에게 명함을 주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회의 랄것도 없었다. 주가 이야기 하기를 이 거래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기 회사의 사장은 급한 일이 생겨 아침에 베이징을 가서  부득이 이 자리에 참석을 못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거래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주신 것 만으로 우리는 귀사에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고 덧 붙였다. 그러니 일단 돌아가시면 우리가 보내준 프로포마  인보이스에  따라 신용장을 곧 개설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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