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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Sep 15. 2021

#6. 상이한 조직 생활의 정의

직장생활 탄원서



첫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학인은 8시 10분에 도착해서 아직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동안 학인은 사수로부터 서무 일을 배웠다. 전화를 받고, 매주 월요일마다 있을 팀 회의 자료를 만들고, 영수증 지출 처리를 하는 등의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였다. 


그의 사수인 김창희 주임은 요즘 보기 드문 단신의 남성이었는데, 160센티미터가 약간 넘는 정윤보다도 손가락 세 마디가 더 작았다. 입사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고 밝힌 그는 창백한 얼굴에 다크서클이 심하고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눈을 부자연스럽게 깜빡거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장교처럼 짧은 스포츠머리에 M자 탈모가 심해서 언뜻 드라큘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김창희 주임이 학인을 대하는 태도는 한숙자 과장처럼 적대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냥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군대에서 보고 배운 조직생활의 특수성이 회사에서도 반드시 적용되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상사의 말은 곧 법이었다. 항시 다나까 말투를 쓰고 압존법을 모르는 일부 여자 직원들을 못마땅해했다. 특히 자신보다 몇 달이라도 늦게 들어온 직원에게는 무조건 하대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난 목요일에 김창희 주임은 간단한 인수인계가 끝나고 학인을 6층 휴게실로 데려갔다. 그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학인을 주고는 옥상으로 연결되는 철문을 열고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숨죽이고 있던 1월의 칼바람이 약간의 거리를 둔 두 사람을 기습했고 김창희 주임은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담배 피워?”


이가 누런 김창희 주임이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녹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에는 칸막이도 없이 재떨이만 설치된 간이 흡연실이 있었다. 재떨이 바로 옆에 선 그는 쉴 새 없는 자연의 훼방으로 담뱃불을 붙이는데 한동안 애를 먹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끊었습니다.”


학인이 웃옷 깃을 여미며 거절했다. 김창희 주임도 내밀었던 담배를 도로 담뱃갑 안으로 집어넣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문 우측 외벽에 설치된 벽걸이 형 온도계가 영하 1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담배를 끊었어? 독하네. 잠깐만,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학인이었지. 내가 선배니까 말 편하게 할 게. 근데 몇 살이야?”


“저 올해로 서른 살입니다.”


“서른 살이면... 89년 생? 나보다 많네? 난 92년 생인데. 혹시 반말한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지? 군대 갔다 왔잖아?”


“예, 괜찮습니다.”


학인은 티는 안 냈어도 그의 태도가 전반적으로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궁금한 거나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나한테 물어봐. 알려 줄게.”


“네, 감사합니다. 생기면 그렇게 할게요.”


학인의 대답이 김창희 주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의 인상이 얇은 전사지가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피부가 워낙 얇아서 주름진 그의 얼굴이 변종 스핑크스 고양이와 똑 닮아 보였다.


“요? 너 군대 갔다 왔다매? 다나까 어떻게 하는지 몰라?”


김창희 주임이 신경질 적으로 담배 연기를 이 사이로 흘리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네? 모르는 건 아닌데… 무슨 회사에서도 군대 말투를 써야 되나요?”


학인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김 주임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학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과 숨결에서는 담배 찌든 내가 진동했다.


“학인아. 너 군대 어디 갔다 왔어? 혹시 공익이냐?”


“아니요. 육군 만기 전역했습니다.”


“어디 부대 나왔어?”


그는 못 믿겠다는 듯 캐물었다.


“그게...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한국군지원단이라고 미군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뭐야? 너 카츄샤인가 뭐 그거야? 나도 알아 자식아. 쯧쯧 어쩐지... 이러니까 애가 이 모양이네.”


김창희 주임은 담배를 끼운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혀를 찼다. 학인은 자신보다 어린 사수가 자꾸 어른인 척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다. 학인도 이번에는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보통 잘 모르시는데 미군부대 내에도 한국군 장교들하고 선후임들 다 있어서 육군이랑 비슷한 생활도 충분히 했습니다. 업무를 주로 미군들이랑 했을 뿐이고요.”


“그래? 그건 네 판단이겠지만 난 그런 사짜 같은 건 군대로 인정 안 해.”


학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그저 이등병 시절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한 선임에 대한 기억이 되불러졌을 뿐이었다.


“솔직히 내 생각은 이래. 학교 졸업하고 공동체 생활을 어디서 처음 하지? 군대잖아! 군대 안 갔다 온 애들, 공익이나 면제 같은 새끼들은 딱 겉으로만 봐도 티가 난다고. 왜? 조직 생활을 안 해봤으니까. 뭔 일을 같이 하려고 하면 지가 뭘 먼저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분담을 해야 효율적인지 판단도 못 내리고 그저 멀뚱멀뚱 가만히 있어! 네가 네 친구들이랑 여름에 계곡을 갔다 쳐. 세 명은 군필인데 두 명은 미필이야. 물에서 놀고 나중에 밥 먹을 때 봐라? 군필들은 알아서 자리 만들고 불 피우고 집게로 고기 굽고 시키지 않아도 척척 하는데, 미필들은? 백퍼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할 거야. 공감 가?”


“그런가요?”


학인이 키가 작은 김창희 주임을 내려다보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학인도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김창희 주임이 워낙 작은 탓에 두 사람의 신장 차이는 15센티미터나 됐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위를 올려다보며 설교를 계속했다.


“나는 회사 생활이 군대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강제성은 없으니까 안 한다고 누가 영창 보내고 그러진 못하겠지만, 솔직히 연장선상으로 봐야 된다고 본다. 상사가 명령을 내리고 아랫사람은 그저 따른다. 그게 어떤 조직이든 가장 효율적인 운영 방식이야. 똘똘하니까 선배 말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하, 참! OJT 때 이런 기본적인 걸 교육해야지 쓸데없이 타 부서 업무를 왜 가르쳐 주냐고! 아 진짜, 어떤 놈이 기획했는지 열불 난다, 열불 나. 이러니까 회사가 이 모양이지. 으! 더럽게 춥네. 이제 그만 들어 가자!”


옥상 사건 이후로 학인은 김창희 주임이 극도로 불편해졌다. 전반적으로 그의 태도는 건들거렸으며 어투는 가볍고 유식한 척하지만 오히려 무식해 보였다. 학인은 사수의 주장에 조금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달콤한 서열의 맛을 본 옹졸한 사내의 편협한 생각에 불과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보수적이라지만 군대식 문화를 차용하지 않는 기업들도 많아지는 추세였다. 그래도 학인은 김창희 주임을 대할 때 최대한 다나까 말투를 사용하려 노력했다. 그가 두렵다기보다는 온전히 원활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학인의 모습을 본 김 주임은 승리로 도취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뿌듯해했다.


학인은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같은 몸으로 옥상을 벗어나는 김창희 주임의 뒤를 따랐다. 계속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이 얼음만큼이나 차게 느껴졌다. 문득 신명호 대리가 생각났다. 지난주 OJT 시간에 신명호 대리 역시 선배로서 이상적인 회사 생활에 대하여 나름의 주장을 펼쳤던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했을 때, 신명호 대리와 김창희 주임은 서로 대칭점에 서있었다. 학인은 고민할 것도 없이 신명호 대리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방금 더럽혀진 정신을 회개하듯 일주일 전 기억을 끄집어내어 차근차근 신 대리의 말을 곱씹었다.


***


OJT는 원래 경영관리팀, 재무회계팀, 정보전산팀, 글로벌통상팀, 일자리지원팀, 마케팅지원팀, 이렇게 총 여섯 개의 팀이 스케줄에 맞춰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정보전산팀의 담당자가 급한 업무 일정으로 순서가 제일 끝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교육에는 학인과 정윤 그리고 재혁 말고도 뜻밖에 계약직 직원들이 함께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미 입사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였는데, OJT 진행자이자 경영관리팀의 교육 담당자인 신명호 대리는 OJT가 1년 단위로 입사한 직원들을 묶어서 진행한다는 부연설명으로 세 사람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디귿 자 테이블이 공간의 대부분을 채운 회의실 뒤쪽에는 유명 커피 브랜드에서 케이터링 한 대용량 아메리카노 박스와 점심 식사 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명호 대리는 언제든지 편하게 먹으라면서 그래야 다른 간식을 더 비축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농담을 건넸다. 이에 신입사원 모두가 웃었지만 나머지 다른 직원들은 시큰둥했다. 학인은 어쩐지 냉랭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그들을 보며 뭔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저희 경영관리팀에서는 제가 석사를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를 전공했기도 했고, 팀장님이 연간 사업이나 행사 기획, 전략 쪽 파트를 경영기획 실장님하고 겸직하시다 보니, 이렇게 저와 제 밑에 주임 한 명이 거의 인사 파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인사 관련 증명 서류는 개별적으로 시스템에서 출력 가능하고 그 외의 것들은 저희 쪽으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신명호 대리는 준비한 자료를 하얀 스크린에 띄우고 개괄적인 회사 정보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3년 전 부임한 김석규 원장의 소개부터, 31년 회사의 연혁, 조직도와 각 사무실 위치, 전 직원의 수와 계약 형태를 간략히 소개했다. 학인은 표에 나타난 수치를 보고 정규직보다 계약직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학인은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계약직 직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하필 자리배치 역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필요에 의해 임시직으로 뽑혔을 지라도 불안정한 계약 형태를 굳이 상기시키는 것이 조금 민감할 수도 부분이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 사람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신 대리도 민감한 부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지 해당 슬라이드에서는 총 직원 수만 빠르게 언급하고 서둘러 다음으로 넘겼다.


그 이후에는 회사가 어떤 복지를 제공하고 있는지와 연간 진행되는 행사들을 순서대로 설명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학인은 자신의 동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겨진 하얀 셔츠를 입은 정윤은 점심시간 이후에 받은 회사 다이어리에 필요한 내용들을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제일 뒷자리에 앉은 재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폰 게임에 열중했다.


신명호 대리의 유쾌한 말주변으로 예정된 40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서 손뼉을 쳐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마지막으로… 다른 회사랑 비교해서 개선돼야 할 점들, 혹은 좋은 아이디어나 기타 건의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에게 메신저나 이메일 통해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곳은 많이 보수적이고 변화가 거의 없는 직장이긴 합니다만, 3년 전 김석규 원장님이 부임하시면서 많은 긍정적인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많이 노력했지만 원장님이 젊은 직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주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OJT도 그 성과 중 하나고요.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런 교육은커녕 달랑 A4용지 두 쪽에 퇴사한 전임자가 대충 타이핑한 매뉴얼이 전부였거든요…….”   


숨을 고르는 신명호 대리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신 대리는 잠시 경청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5년에 걸쳐 살신성인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열정 가득한 선명한 눈동자의 이면엔 쌓인 불만 또한 많은 듯했다.


“……저는 회사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직급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자유롭게 발언권을 갖고 함께 참여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소수의 의견에 치우쳐서 비리가 생기거나 하는 등의 퇴보가 일어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지금 원장님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한낱 대리인 제가, 원장님의 신임을 방패로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고 건방질 수도 있겠지만… 젊은 신입 직원들의 목소리를 한 데 모아서 표출해야 이 보수적인 조직에도 작은 변화부터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사자성어가 하나 있는데 마부작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라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도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감사합니다. 곧 재무회계 차 팀장님 들어오실 거예요.”


오직 학인과 정윤의 손에서만 박수가 나왔다. 계약직 직원들은 신명호 대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따르고 자기들끼리 잡담을 시작했다. 학인은 이들의 무례함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명호 대리가 회의실을 나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야, 언니 방금 그 연설 뭐예요? 아, 오그라들어 죽는 줄 알았네."


"또 정직원 신입들 왔다고 허세 부리는 거지 뭐. 전부 다 정직원으로 전환시켜줄 것도 아니면서 혜택도 못 받는 우리 불러 놓고 회사 복지가 어떻고 하는 거 웃긴다 진짜."


"그러니까요. 건의 같은 소리 하고……."

  

속닥거리듯 험담을 하던 여성 두 명이 막 들어온 재무회계팀 차계용 팀장과 마주치자 서둘러 목소리를 죽였다.


차계용 팀장은 민머리였다. 그는 자신이 대머리인 것이 콤플렉스였는지 사람이 숫자와 관련된 업무를 하다 보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진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수입과 지출 처리 시에 사용되는 사내 시스템 사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다음 교육자인 반일식 팀장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만큼 회의실 문을 박살 낼 것처럼 세게 열어젖히더니 들어오자마자 대뜸 학인을 찾았다. 점인지 검버섯인지 모를 얼룩이 가득한 잿빛 얼굴에 납작하게 눌린 코와 억울하게 내려앉은 눈매. 양쪽 눈썹이 미간에서 거의 이어질 정도로 정리가 안 된 숱 많은 눈썹. 글로벌통상팀의 반 팀장은 누가 보더라도 괴팍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진학인이 누구지! 누구더라? 면접 때 봤는데 내가 기억이 안 나네?”


하이톤의 목소리가 우렁찬 반 팀장의 행동은 어딘가 과장되고 산만해서 마치 대학로에서 블랙코미디 무대에 서는 배우 이미지를 자아냈다. 학인은 면접장에서 그를 본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 진학인이 너야? 젠장, 내가 착각했네.”


반일식 팀장은 학인이 마치 자신이 예상했던 적임자가 아니라는 듯 대놓고 실망감을 표출했다. 회의실 안에 모든 사람이 그 적나라한 의도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들 고개를 돌려 학인의 눈치를 살폈다.


“난 글로벌통상팀, 반일식입니다.”


반일식 팀장은 40분 내내 사적인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 침을 튀기며 주절거리는 그는 애초에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원래 업무는 실수도 하고 직접 부딪혀보면서 배우는 거지, 이렇게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게 아니야. 회사가 무슨 학교야?”


그는 책상에 걸터앉아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리고는 일면식이 있는 계약직 여자 직원들을 표적으로 삼아 잔소리를 시작했다. 특히 애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소리를 거의 종교적 진리처럼 반복했는데, 이미 소문으로 반 팀장의 악명을 익히 아는 직원들은 화장실로, 아니면 급한 전화를 핑계로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팀장이 될 사람의 실체를 파악한 학인은 절망했고 정윤은 한숙자 과장이 최악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에 속으로 안도했다.


신명호 대리의 의도적인 중단으로 반일식 팀장이 퇴장하고 뒤이어 정보전산팀의 교육 담당자가 들어왔다. 진갈색 뿔테 안경에 5대 5 가르마를 어중간하게 탄 머리, 이마로 끊임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회의실로 들어서는 퉁퉁한 남성은 어쩐지 학인의 눈에 익었다.  


“아이고, 늦어서 미안합니다. 허허. 갑작스럽게 서버가 말썽 이어 가지고 좀 보는 바람에... 아무튼!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몇 명 아는 얼굴도 보이는데… 아, 저는 정보전산팀 박대근 과장이라고 합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18층 주민의 얼굴을 본 학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놀라움에는 약간의 기쁨도 같이 섞여있었다. 면접 날 엘리베이터에서 막연하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지다니. 친절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 그것이 학인이 미래의 회사 생활에 품었던 소박한 바람이었다. 학인은 직원들 앞에서 느끼한 표정을 짓고 사담을 나누고 있는 박대근 과장을 또 한 명의 신명호 대리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희망사항이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는, 자신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직원들은 교육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총걸음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재혁과 정윤도 화장실로 향했다. 홀로 남은 학인은 왜 자신이 부서 순회 시에 대근을 못 봤는지 의아했다. 그래도 어쨌든 기뻤다. 학인은 들뜬 마음으로 복도 끝 정수기 앞에서 신명호 대리와 대치 중인 자신의 아파트 주민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벽과 천장에 수차례 부딪혀 뭉개졌던 두 사람의 커다란 대화 소리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근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학인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저기 뭐야. 신 대리님. 요즘 뭐가 이렇게 자꾸 생기는 거야?"


대근은 신경질적으로 일회용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팽개쳤다.


"네?"


신 대리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조직이 어울리지 않게 변화가 어쩌고 혁신이 어쩌고 하면서 이상한 일이 많아졌잖아요. 이게 다 누구 작품이야? 내가 파악하기로는 우리 신 대리 작품 같던데? 아닌가?”


"아… 혹시 OJT 말씀하시는 건가요?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이건 거의 모든 회사들이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실시하는 너무나 당연한 과정―"


"거 참!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습니까!"


순간 대근이 언성을 높여 신 대리의 말을 묵살했다. 복도가 그의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학인은 코너에서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서야만 했다. 그의 시야에는 정수기와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등을 지고 있는 신명호 대리만 보였다.


"아니, 그전까지 이런 거 없어도 잘만 돌아가던 회사였는데. 굳이 남들 다 한다고 따라 하면서 구색만 갖추는 게 무슨 혁신인지는 난 잘 모르겠거든. 덕분에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애먼 사람들만 추가로 자료 준비하고, 결재받고, 발표도 해야 하고... 개고생하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과반수 이상이 반대한 기획을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밀어붙이면 그게 맞는 겁니까? 솔직히 회사 위한답시고 말하지만 속내는 본인이 원장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이 맞죠?"


신 대리는 말이 없었다. 과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어떤 분노가 서려있는 듯했다. 심지어 그의 손은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신 대리. 어쩌다 원장님이랑 쿵짝이 잘 맞아서 이것저것 시도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도, 그래서 예쁨 받는 것도 다 알겠는데...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솔직히 그 양반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양반이잖아요? 내가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원래 그 자리가 다 그런 자리잖아요, 안 그래요? 툭 까놓고 말해서 계약직인데 뭐. 허허. 저기 뭐야. 부처에서 원하는 사람 있으면 과일에 이쑤시개 꽂듯 콕! 콕! 꽂아 넣고. 안 그래요? 허허허. 어? 표정이 왜 그래요? 기분 나빴어요?"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했습니다, 박대근 과장님. 다음에 아무리 제 기준 당연한 것이어도 다른 부서에 협조가 요구되는 기획과 관련해서는 내부 의견을 조금 더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또 내 말 오해하지 마시고! 내가 당연히 알긴 알죠. 우리 신명호 대리 유능하고 일 잘하는 거! 신입 사원 교육! 당연히 해야죠. 근데 그냥 나는 우리 기관에 떠도는 여론을 좀 대변한 것뿐입니다. 조금 더 심플하게 가자는 거죠, 거창하게 말고. 계산적으로 혼자만 튀려고 하지 말고! 허허. 내 말 알았죠? 이제 화 풀어요. 예? 그 무섭게 쥔 주먹도 좀 펴고.”


대근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보드라워지면서 신 대리를 다독였다.


“신 대리, 담아 두기 없깁니다?"  


대근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있던 신명호 대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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