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알던 착한 아내가 사라졌다

08.

by Kyle Lee

“당신 요즘 좀 변한 것 같아.”


나의 말에 아내가 쫑긋 귀를 세운다.


“뭔가… 짜증이 많이 늘었어요.”


잠깐의 침묵 뒤 아내가 말한다. 맞아요. 나 요즘 좀 그래. 역치가 낮아졌어.


“모든 일에 대해서 참을 수 있는 역치가 낮아졌어요. 날 불편하게 하는 어떤 자극이 오면 나도 모르게 순간 욱하고 그 역치를 넘어버려요.”


이렇지 않았었는데. 아내의 말 끝이 흐려진다.


아내가 변하고 있다


아내가 변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순한 와이프가 아니다. 아내와 함께한 12년 동안 목소리 높여 싸웠던 일이 있었던가? 심지어 결혼준비를 하면서도 불만을 토로할지언정 짜증이나 화를 내는 일은 없었던 아내였다. 그러던 그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다. 눈에 띄게 날카로워진 아내는 땅에 묻힌 시한폭탄 같았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크게 터질지 모르는 그런 폭탄.


임신 7주 차로 접어들면서 아내는 부쩍 더 힘들어했다. 안 그래도 늘었던 잠이 더 늘었고, 입덧은 더 심해졌으며, 심지어 평소의 절반도 먹기 버거워했다. 잠을 잘 때면 꼭 내 손을 붙잡고 자던 아내는 등이 닿으면 토할 것만 같다며 내 반대쪽으로 멀찌감치 돌아누워야 잠이 들었다. 새벽에도 갑자기 토할 것 같은 느낌에 몇 번씩 깨어 화장실에 가야 했고, 습관처럼 설사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곁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아내는 많이 힘겨워했다.


아내의 짜증은 아마도 신체적인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급격한 호르몬의 변화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하는 신체적인 변화. 식사도 수면도 휴식도, 무엇 하나 편하게 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어 지쳐가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솔직히 마음까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공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아내가 경험하고 있는 그 아프고 힘든 과정은 지친 아내의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날 뿐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나는 걱정을 할지언정 아내의 아픔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아내가 힘들어지는 만큼 나의 불만도 조금씩 자라났다. 아내의 짜증 섞인 표정과 말투가 일상 속에서 나를 찌를 때마다, 나는 당황하고 뒤로 물러서며 내가 뭘 잘못했는가를 돌이켜보아야 했다. 평소보다 더 조심하고 배려하고 있는데도 죄인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든 아내를 붙잡고 화를 낼 수는 없다. 저 짜증과 화의 원천이 나의 잘못이 아니듯 아내의 잘못도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아내의 힘든 시간을 함께 감수하려 하듯이, 아내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납작 엎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불만이 쌓여가도 내색하지 말자고. 비록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만의 것으로 꿀꺽 뱃속 깊이 삼켜버리기로.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가시처럼 남아 나를 괴롭히는 생각. 아내는 언제쯤 예전처럼 인자한 표정을 되찾을까. 혹시, 이대로 완전히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결혼할 때 한 번
임신할 때 한 번
아이를 낳은 후 한 번


회사 전체 회식자리에서, 나는 동료들에게 아내의 임신사실을 알렸다. 이미 고등학생 학부모가 된 A팀 팀장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힘들죠? 이제 예전 같지 않을걸요.”


좋은 시절은 다 끝났네요. B팀 팀장이 거들었다. 그는 이제 두 살 된 아이의 아빠다.


“여자는 세 번 변해요. 결혼할 때 한 번, 임신할 때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은 후 한 번.”


이제까지 팀장님이 알고 지내던 와이프를 떠올리면 안돼요.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랑 산다는 생각으로 적응해야지, 안 그러면 많이 힘들어져요. A 팀장은 베테랑 유부남의 포스를 독한 안동 소주와 함께 술잔 가득 채워주었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말수가 참 적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면에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며 낄낄, 웃으며 말하는 A팀장님. 나만 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아이를 가진 유부남 팀장들이 합심해서 쏟아내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들. 뭘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겁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현실은 그보다 아주 조금 더할 겁니다.


그래도, 축하해요


한참을 신나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축하해요.


“축하해요. 아이를 갖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정말 너무너무 힘든데, 그래도 좋은 일이에요.”


힘든데 좋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 그 축하 인사는 지금껏 놀리며 쏟아내던 장난기 어린 말과는 다른 무게감을 가지며 내게 다가왔다. 축하해요.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출근하는 동료들의 얼굴 속 그 어딘가, 잔잔하게 깔려있는 기운의 원동력을 본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이미 이 힘든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겨냈다. 그 안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고, 또 그 자체로 생활을 계속해나갈 힘을 얻고 있다.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아내가 변하고 있다. 여전히 내게는 적응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여전히 나는 변하게 될 우리의 관계가, 우리가 꾸려갈 가정의 모습이, 새롭게 정립될 우리의 일상이 두렵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이 너머에는 분명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고난의 시간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는 묵직한 균형추도 함께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언젠가 고난의 시간을 앞둔 후배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 전할 수 있는, 양 발을 땅에 디디고 서서 웬만한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해줄, 바로 그 무게추.


부디 그 무게추로 인해 아내도 나도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전 07화산부인과 의사가 남자라서 싫진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