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후무한 대혼돈 속에서 경험한 것들
한동안 연재가 뜸했다. 분노와 슬픔, 불안과 좌절, 환멸을 넘어 이제는 될 대로 돼라… 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학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고생길 아닌 대학원 생활 또한 없다지만, 지난 학기,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겪어야 했던 심적 부침과는 차원이 다른 위기가 이토록 세게 불어닥칠 줄 예상이나 했을까. 글을 다듬을 여력이 없어 일기장마냥 아무렇게나 뇌까린 글을 올리게 된 점에 대해 너른 양해를 구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미국 전역의 대학에 대한 새 행정부의 공격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NIH, USAID, NSF와 같은 연구비를 집행하는 연방 기관의 기능을 셧다운시키는 것이었다. 그 후 다양성이나 백신과 같은, 새 행정부의 노골적인 검열 대상과 관련된 연구 프로젝트의 예산 집행이 하나둘 취소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내가 속한 상담심리 분야는 보건과 교육 둘 다에 접점이 있는 곳이라 그 여파가 꽤 컸다. 당장 돌아오는 가을부터 학과로부터 주어지는 조교 자리가 반 이상 줄어들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심지어 신입생에게는 줄 돈이 없으니 대출을 알아보라는 공지까지 나갔다. 나 역시 돌아오는 가을에 생활비를 받을 수 있을지, 아니, 생활비는커녕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마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심란스러운데, 설상가상으로 유학생의 미국 체류 자격이 연달아 말소되는 일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 참여한 유학생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명목으로 낙인 찍어 추방시켰다. 이민국 요원이 갑자기 들이닥쳐 길 가던 유학생을 강제로 연행해가는 영상이 한창 바이럴을 탔는데, 이 학생, 고작 자기 학교 신문에 사설 실은 죄가 전부란다. 순진한 축에 속하는 일부 한국인 유학생은 이때도 정당한 세상 편향(just world fallacy)에 빠져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과 관계가 좋은 편이니 괜찮을 거라고, 나처럼 시위도 안 하고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은 별 영향이 없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분리시켰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살면서 검열이 사람 가리는 것을 단 한 번도 보고 들은 바가 없는 나에게는 영 어려운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또 어찌나 잘 들어맞는지. 3월 말 즈음부터 시위에 참여한 적이 없는 유학생의 체류 자격마저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말소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과속 티켓 때문에, 허위 신고로 경찰에게 조사받은 기록 때문에, 심지어는 특정할 수조차 없는 불분명한 이유로 체류 자격을 말소당한 사람들의 증언이 여기저기 이어지는 중이다. 지난 주에는 우리 학교에서도 1명의 유학생이 체류 자격을 말소당했고, 이번 주에는 그 수가 5명으로 늘었다. (이게 그나마 적은 편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학교에서 발생한 5명 중 1명은 한국 국적자로 알려졌다. 이번 주에는 한국인 교수마저 학기 도중 체류 자격을 말소당해 강의조차 마치지 못하고 중도 귀국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테뉴어 트랙에 몸담은 교수마저 이렇게나 쉽게 내쫓는데, 대학원생은 얼마나 우스울지.
[4/27 업데이트] 체류 자격 말소에 대한 소송이 미국 전역에서 줄지어 이어지자 취소된 체류 자격을 복구하고 새로운 절차를 마련하겠다는 미 법무부의 발표가 보도되었다. 소식이 전해진 후 다들 한숨 돌리는 분위기지만,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또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기에 마음 놓고 지내긴 어려울 것 같다.
새 행정부가 검열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리버럴의 온상으로 꼽히는 대학을 말 잘 듣는 기관으로 바꾸는 것. 그 과정에서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미국 내 여론이 돌아서지 않는 한 이러한 기조가 바뀔 것 같지도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인은 역사를 통틀어 독재를 경험한 적이 없다. 한국이라면 이게 바로 독재라며 이미 들고 일어나고도 남았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미국은 생각 이상으로 조용하다.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전 시위와 관련된 게시물에 반응을 보인 기록이 남았을지 모를 SNS를 지우고, 개인 홈페이지에 걸어둔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사를 지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내가 미국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 경험이 과연 내가 미국에서 기대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사회정의 옹호를 실천하고 싶어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소수자 집단에 대한 연구로도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려고 결정한 미국행이었는데… 한국보다도 더한 차별과 억압, 더불어 유학생 신분이라는 취약한 지위 아래 학위 딸 때까지 몸 사리는 데에만 급급한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다 그만두자니,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에너지, 돈, 기회비용이 아깝고. 불확실성에 저당 잡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셈이다.
건너 알고 있는, 마찬가지로 체류 자격을 취소당한 한국인과 짧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위로를 전했는데,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막상 통보를 받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좋단다. 그 말에 십분 공감이 갔다. 소송을 하든, 조용히 귀국하든, 그 다음 스텝을 밟아나갈 단초가 생긴 그와 달리 나는 그냥저냥, 학업에 집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채로 학기만 끝나기를 바라는 신세가 됐으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온갖 것들에 대해 하소연하는 것조차 지치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유학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싶다. 일단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그때 마음을 추스른 후 연재를 이어갈지 말지 결정할 생각이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유학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기만으로 느껴진다. 이 상황에 누구 좋으라고 유학 권하는 글을 쓰나. 미국 유학을 더 이상 권할 수 없는 이유를 세 줄로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새 행정부의 여러 조치로 인해 대학 전반의 자금 사정이 나빠졌고, 앞으로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까지의 일들로 볼 때 어느 전공, 어느 프로그램이든 언제, 어떻게 돈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여유 자금이 있지 않은 한 돈 끊기면 유학 생활 끝이다.
누구든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과속 티켓 가지고 웃을 일이 아니다. 설사 그보다 못한 이유로 쫓겨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은 현실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될 예정이고, 이에 대한 공포감과 불안은 유학생은 물론 학계 전체에 퍼진 상태다. 미국 유학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할 만큼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