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즈기의 철학

by 상욱애비


올 초에 김주선 수필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 글들을 보았고, 내 아이의 삶에 감명을 받아 ‘킨즈기 키트’라는 글을 발표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아들의 무한도전을 알리고 조건과는 별개로 희망을 전파하고 싶었던 나는 고맙기만 했다.


『킨즈기 키트』를 읽는 내내, 내 마음은 감사한 마음 외에 다른 사람의 장애에 관한 따듯함의 시각을 느꼈다. 망치로 때려 부수던 흠집과 균열의 흔적을 완성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그 반전의 의미. 실패와 상처를 약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는 문장에서는 뭔가 서글프면서도 통쾌했다. 하루내내 작가의 시선에 이끌려 깨지고 상처 난 부분이 오히려 금빛으로 빛나는 킨즈기의 철학을 곱씹어 봤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도자기가 가마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완성되듯, 사람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완제품’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순간부터 완성된 존재일까? 그렇다면, 장애를 안고 태어난다는 것은, 시작부터 ‘실패한’ 인간이라는 낙인이 되는 걸까?


생명체와 비생명체, 창조자와 피조물의 차이는 분명하다. 도자기가 장인의 손에서 빚어지고, 가마 속 불길을 견뎌야 비로소 그 형태를 얻는다면, 사람은 이미 빚어진 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빚어지고 ‘삶’이라는 과정에서 완성해가는 존재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금이 갔다’고 불량품처럼 낙인찍히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한다.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환경에서 ‘조건’이라는 재료로 반죽이 되어, 삶이라는 가마에서 불길과 압력을 견뎌내며, 각자만의 독특한 결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유전적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이는 더디게 배우며, 어떤 이는 신체가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함’이라고, 고쳐야 할 ‘흠’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결함이라 부르는 것은 조건이다. 피부색도, 키도, 말투도, 신체적 발달의 정도도, 지능도 모두 각자가 가진 조건이다. 문제는 그 조건을 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생길 때 시작된다. 그 기준이야말로 인간을 규격화된 공산품으로 폄하하는 폭력이고 갑질이다.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과 장애를 포용한다는 것은 다르다. 이해는 머리로 분석해서 하는 것이라면, 포용은 마음으로 받아주는 일이다. 인간은 모두 온전한 존재고 장애는 ‘불편함’이다. 복지 지원 차원에서 불편함(장애)을 진단하는 기준이 필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기준이 곧 ‘결함’으로 비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지능 기준에는 조금 떨어지지만, 인성이 탁월한 아들을 두었다. 그 아이는 부모를 잘 따르고,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자신의 불편함과 고통을 밝게 웃으며 감내한다. 그런데 왜 이런 특성은 귀하게 존중받지 못할까. 왜 사람의 가치는 지능지수와 학업성적으로 줄 세워지고, 어른이 되면 결과로만 평가받는 걸까. 이런 사회가 진정으로 인간이 만든 사회일까?


포용, 이해, 선함 그리고 장애 인식은 서로 다른 문제다. 선함과 친절이 장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사람의 존재를 오로지 신체적, 지적 능력으로 구분하고 결과물에 기준을 두는 태도.’

‘장애를 기능적 결함으로만 규정하는 시선.’


이런 것들로 인간에 대한 존중은 무너진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편견의 실체가 아닐까?



치료가 가능한 것은 치료하면 된다. 보조 기술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을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타고난 조건은 고치는 대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고유함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인권이 가능하다. 사람의 가치를 기능과 능력으로 나누지 않고, 누구나 한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존중받는 사회. 그런 사회야말로 사람이 진정 주인이 되는 사회가 아닐까.


일본의 전통공예인 킨즈기(Kintsugi, 金継ぎ), 수리가 목적이었던 기술이 지금은 도자기 예술의 한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수리가 목적이던, 실패의 흔적이 과정의 미학으로 존중받게 된 것이라면, 이 사회의 포용은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조건과 과정 그리고 과정에서의 상처까지, 온전히 "완벽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다양성의 사회에 맞는 철학이 아닐까?


“상욱아 아빠는 네가 완벽하다고 생각해. 너는 기준이 있는 공산품이 아니라 발전의 한계가 없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 가는 존재니까.”


“그게 뭔 소리야?”


헬스 가방을 들러메고 따라나서는 상욱이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김주선 수필가님의 따뜻하고 선함을 비평하는 게 아니고, 사회의 장애에 관한 시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선함과 따뜻함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포용과 이해가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표현이 서툴고 이 사회를 생각하면 울컥하는 습관이 있어 글이 거칩니다.

김주선 수필가님 같은 선한 분들의 영향으로 사실은 지금까지 버텨 왔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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