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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가슴으로 하는 것

영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by 교주

영어를 배우던 고등학생 때에 처음으로 영어로 전화를 해야 했던 적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상대방이 저쪽에서 답을 한다 "헬로!" 사실 전화를 하기 전에 든 생각이 있었다. 평소에는 주어와 동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말과는 다른 영어 어순이 참 어색하고 힘들었다. 엉뚱하게도 전화 속에서는 미국친구들이 잘못된(?) 어순을 한국어순으로 바꾸고 버터 바른 발음도 좀 안 할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얼굴을 맞대고 할 때와 마찬가지로 꺼꾸리 어순이었다.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상대방이 안타까워 혹시 한국말로 하면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한국말을 했더니 더욱 못 알아듣는 게 아닌가? 엉뚱한 내 상상에 혼자 피식 웃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혼자 프랑스 여행을 할 때였다. 유레일 기차를 타고 두리번 대다가 빈자리가 있는 객실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영화에서 본 귀족 같은 프랑스 아주머니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대충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곤 대화를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말을 영어로 했고 그분도 열심히 프랑스 어로 자기 말을 했다. 조금 있다가 검표를 하러 온 승무원이 영어로 "이 칸은 일등석인데... 표가?"라고 말했다. 아마 귀족 아주머니는 "일등석을 샀니?" 하는 말을 했었나 보다. 쫓겨나면서도 안녕 인사를 알뜰히 챙겼다.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실질적 상황을 통해 영어를 배우며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못 알아들으면서도 친구가 되는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계 여행을 하면서도 그 나라 말을 몰라도 현지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고 정보도 얻고 필요한 도움을 쉽게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말 자체보다는 인간적 소통의 중요성을 습득했고 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구촌의 시민이 되었다.


지난주 처음 브라질에 강의를 갔었다. 너무 웃긴 상황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참가자들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한국사람들이 골고루 모여 대충 스페인어와 한국어에 손짓 발짓을 섞어 대화를 해야 했다. 남미의 모든 나라가 스페인어를 쓰기에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서로 알아듣는데 지장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중남미에서 브라질만 포루투칼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스페인어를 쓰는 다른 모든 나라가 약간의 비슷함이 있어도 서로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한국어로 강의를 하고 아르헨티나 분이 스페인어로 통역을 했다. 브라질에서 개최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언어로는 통역이 되지 않았다. 나는 브라질에서 강의를 하며 책으로만 알던 것을 직접 체험을 통해 많이 배웠다. 브라질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장애인 프로그램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장애인들을 아끼고 도와주려는 분들이지만 어떻게 도와야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하는 의문을 가지고 특수교육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어휘력 갑인 한 브라질 목사님이 가슴이 뜨거워져 말을 마구 쏟아내는데 대략 난감이다. 가끔 튀어나오는 영어와 비슷한 단어와 단어들을 연결하고 그의 제스처, 몸짓등을 꿰어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필름제작을 하던 사람인데 한 장애단체 모임을 취재하던 중 한 장애인의 간증을 듣고 감읍되어 그 자리에서 직업을 버리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였다. 미래를 준비하는 전환교육을 전공한 나는 그의 이직결정에 감동했다. 그리고 특히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마음이 묻어 나와 나는 이미 그와 친구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목사님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장애인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의아했다. 그는 이미 브라질어 언어장애가 있는 나와 대화를 했고 친구가 되었는데 그의 질문은 나를 놀라게 했다. 브라질어를 못하니 말로 설명을 할 수 없기도 했지만 나는 조용히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말이 필요 없고 그냥 옆에 친구로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는 답을 몸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장애인들과도 바로 그렇게 옆에 앉아 마음으로 듣고 친구가 되는 것이 대화의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듣지 못했다. 나는 몇 마디 안 되는 스페인어 단어를 꿰어 말을 했는데 그는 다 알아듣는다. 나는 둘이 옆에 앉아 서로 다른 각자의 말을 해도 좋다고 했다. 그는 결코 나를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나는 "정상인"이라 대화의 대상이 되고 언어가 달라도 대화하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장애인"과 대화법을 내놓으라고 이미 "다른" 방법에 대한 기대로 나의 답에 답답해하며 흥분을 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가르고 그 두 집단의 대화법이 다르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아직은 대화법을 배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리오시의 아름다운 호텔 앞 바닷가를 갔다. 그 호텔은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이 다 와서 자고 간 곳이란다. 나는 모래가 시작되는 곳부터 갈 수가 없었고 마침 거기에 바다가 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스페인어로 주스를 시켜 놓았다. 식사시간에 주워들은 말로 "Naranja jugo, please!" 영어 문법에 아는 스페인 단어를 섞은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때 저 멀리서 목사님이 지나가기에 이름을 불러 세우곤 손짓을 해서 불렀다. 전 날 그가 물었던 대화법에 대한 질문에 "언어나 말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답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 싶었다.


그가 다가와 앉자 나는 아는 단어를 모두 다 쥐어짰다. 그분은 리오의 상징인 예수상이야기를 하며 프랑스에서 선물로 주었다고 했다. 어!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도 프랑스가 주었다고 했다. 내 말의 뉴욕과 손을 들어 횃불을 만들고 "프랑스"하자 그는 바로 알아들었다. 대충 때려 맞추다 보니 예수상의 재료는 프랑스가 주고 브라질 사람들이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예수상을 조립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아직도 장애인과의 대화법에 대한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의 말속에서 영어와 비슷한 몇 단어를 찾아 그의 말을 했고 그도 내 말속의 브라질어와 비슷한 몇 단어만으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198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라는 영화는 주인공이 청각장애인으로 수어를 모르는 일반인과 대화가 되지 않는 설정에서 언어 없이 깊고 아픈 사랑을 표현해 냈다. 나는 말로 표현되는 것만에 의지한 대화는 오히려 진심을 읽기 어렵고 진정한 인간관계가 성립되기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말에 따른 행동이나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화자와의 거리, 얼굴표정, 몸의 움직임등이 오히려 효과적인 대화방법이다.


자폐아동들과의 대화도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그 아이가 말을 못 한다고 물러설 필요 없이 그냥 인사하고 몇 마디를 나누면 된다. 브라질에서 만난 목사님은 그렇게 "장애인"을 섬기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음에도 대화의 본질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일행 친구들에게 목사님이 리오의 예수상이 프랑스의 선물이었다던데 진짜예요 하고 물었다. 오히려 브라질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교수님이 똑똑해서 금방 언어를 배웠네요"라고 했다. 아니다! 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다. 아! 답답! 누구와도 당장 대화할 수 있는데 왜 장애인에게는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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