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에 김치를 담듯이
소명은 '부를 소(召)'에 '목숨 명(命)'을 써서 '부름 받은 목숨', 사명이란 '심부름 사(使)'에 '목숨 명(命)'을 써서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명은 “부르심 (Calling)”이고 사명은 “보내심(Mission)”으로 소명은 하나님이 나를 콕 집어 일을 하라고 살며시 부르시는 것이고 사명은 내게 주신 달란트를 기반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터로 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김환기: 크리스찬 리뷰). 나의 강함을 보여줘야 하는 사명이라는 단어보다는 소명이란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 조용하게 특별한 관심을 받는 느낌이라 나에게 은근한 따스함이 느껴진다.
나는 교회 장애인 프로그램에 기둥이 되는 자원봉사자에게 소명에 대한 교육을 자주 한다. 교회에 많은 부서에서 봉사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이 있는데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지원을 했을 때는 남다른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순수 목회자가 되는 길의 신학을 한 사람이 아니고 세속적인 교육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다 보니 하나님과 세속적 이론의 그 중간 어디쯤에서 우리들 삶 속에 있는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한다.
지금은 떠났지만 나는 골프를 무척 좋아했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자식과 골프는 마음대로 안 된다며 얼마나 골프가 어려운지 우스갯소리로 한탄을 한다. 다른 구기종목이 공이 이리저리 마음대로 튀어 어렵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무 움직임 없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을 왜 못 치느냐는 말도 자주 한다. 한 골프 프로가 나에게 말했다.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니 당연히 어렵죠” 하며 성경의 부활을 빗댄 골프농담을 해 나는 한없이 웃은 적이 있다.
맞다. 골프는 홀컵에 공을 넣는 것이 목표인 운동이다. 목표에 부합하는 것을 타당도라고 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골프는 타당도 하나만 가지곤 안된다. 골프는 방금 전에 홀컵을 향해 똑바로 멀리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쳤는데도 다음번에는 앞땅 뒤땅 옆땅… 완전히 골프공만 피해서 헛스윙을 해 대는 일이 비일비재 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과 같은” 골프로 세상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치기가 어려운 종목이다. 그래서 골프에는 “신뢰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특수목회의 자원봉사자는 장애인을 교육하고 도와주는 것이 타당한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잘해도 마음 내키는 대로 들쑥날쑥하게 출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을 한다.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이라도 꾸준하게 (신뢰도) 맡은 장애인을 담당해야 한다(타당도)는 설명으로 교육을 끝내자 목사님이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다음엔 신뢰도는 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하!” 꾸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자 자원봉사를 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포기하고 도망간다는 말이었다.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십분 이해가 간다.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꾸준함의 어려움을 겪는다. 오죽하면 "작심삼일"이라는 우리나라 옛말이 있지 않겠는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를 꾸준하게 나가는 것이 의도치 않게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 마음 깊은 곳에 믿음이 자리를 잡지 않은 상태에서는 흥미를 잃어 스르르 멀어져도 아무 느낌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은 떠나 있어도 늘 마음 한쪽이 무겁고 사람들에게도 당당하게 교회를 안 나간다 나간다 표현을 못하고 쭈뼛댄다.
얼마 전 한 교수님이 박사과정 학생들이 선교에 관심이 있으니 내가 쓰고 있는 성서적 특수교육에 관해 강의를 부탁했다. 신학교도 아니고 교회 관련 대학교도 아니고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혹시 개인적 관심인가 하고 교수님한테 교회를 다니느냐고 문자를 보내자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한다. 그냥 나에게 강의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러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선교활동을 통해 경험하고 있는 북미, 중미, 남미의 특수교육을 소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틀을 잡았다.
어제 그 교수님과 다시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를 안 믿는다면서요” 하는 나의 말에 “믿어요”라고 한다. 내가 깜짝 놀라자 교회가 아니라 천주교인인데 냉담 중이라 믿는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얼버무린다.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마리아가 여성인 것에 끌려 성당을 나갔었는데 마리아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예수님 얘기만 해서 수녀님께 질문하며 잘못 온 것 같다고 말한 경험이 있다며 교회든 성당이든 다 예수 믿는 사람이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도 너무 오래 냉담을 해서리… 하고 말끝을 흐린다. 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척하고 알아들을 말을 했다. “김치통 있죠?” 김치를 담아 사용하다 보면 김치냄새가 배서 다른 용도로 쓰기도 힘들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자 웃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마음에 담았던 사람은 예수님의 향기가 배어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 교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 향은 싫든 좋든 스멀스멀 피어나는 법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물론 교인 간의 교통이 중요하지만 나는 마음에 담겨 은은히 퍼지는 하나님의 향기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고 행동에 냄새가 묻어 나오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린도 후서에는 “우리를 통하여 각처에 그 아시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 (고후 2:14)” “우리는… (중략)…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5)”라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를 향기로 표현하고 있다. 특수선교는 하나님의 은혜인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장애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향기가 배도록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항아리에 김치를 꾹꾹 담아 넣는 사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장애로 인해 말이나 행동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지 못하더라도, 혹은 교회를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도 그들에게서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향기가 풍기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