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보다 소중한 기본 접근권
한국을 떠난 지 40여 년이 지났다. 내가 한국에서 한창 20대 초반의 황금기(?)를 보내던 7080 시대 때에 나에게 유일하게 불가능의 절벽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육교다. 안전한 건널목의 확보를 위한다는 육교가 하나둘 세워지기 시작하더니 서울을 모두 뒤덮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계단을 강제로 오르고 또 올라야 했고 내려가는 것이 공포였다. 나는 매일 택시를 탔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서라도 육교를 피해 내가 원하는 쪽에 내리곤 했다. 얼마나 택시를 많이 탔는지 하루에 같은 택시 가사님을 세 번이나 만난 기록도 있다.
짧은 기간을 올 때는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고 강의등으로 잡힌 일정은 늘 누군가가 와서 데리고 가고 데려다 주어 이동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겨우해야 호텔 주변의 고궁과 책방을 다니는 정도인데 육교가 눈에 띄지 않았다. 육교가 사라진 서울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덕분에 모든 교차로에서 건널목으로 길을 건너며 쉽게 시내 구경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전에는 잘 걸어 다녔기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제는 파워 휠체어를 타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서울지역을 커버하는 장애인 콜택시(이후 장콜)가 2003년부터 운영되어 많은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운영되고 있는 택시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원하는 시간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불평도 들었지만 몇 번 타 보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때에 따라 많이 걸리기도 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 불가결의 공공 서비스라 감사한 마음이 앞섰고 무엇보다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여의도에 있으며 인사동도 갔고 강남도 혼자 장콜을 타고 다녀왔다.
서울시 경계를 넘어가는 주변 도시를 갈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장콜운영이 각 지역자치정부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운영지역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 장콜은 서울지역만, 인천광역시는 인천장콜이, 서울과 인천을 다른 모든 경기도 지역은 경기장콜이 있다. 다른 각 도와 광역시도 마찬가지로 영역이 정해져 있다. 경계의 문제는 인천공항에 도착을 한 경우 휠체어를 타고 짐을 챙겨 인천 장콜로 서울부근까지 가서 서울 장콜을 다시 불러 호텔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출국 시에는 예외가 있어서 항공권을 장콜에 보내면 하루 전에 예약을 해서 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런저런 제약이 두어 달 동안 장기간을 머물기로 한 나는 서울에 갇혀있는 기분 있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부평에 있는 병원을 갔다. 병원 진료권을 가지고 있어 서울 장콜이 부평까지 한 번에 데려다주었다.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돌아올 수 없으면 그곳에서 자겠다는 생각으로 컴퓨터와 옷가지와 세면도구에 휠체어 배터리 충전기까지 한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섰다.
진료가 끝나자 인천 장콜을 불러 송내역까지 갔다. 아! 송내역은 부천이라 서울장콜을 부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경기도 장콜을 불러 서울경계를 넘고 거기서 서울 장콜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생각지도 않게 경기도 장콜은 서울까지 데려다준 덕분에 무거운 짐을 싼 보따리를 무릎에 놓고 서울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은 용기가 솟구쳐 부평에서 전철로 이동을 해볼 생각이었다. 부평역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한참을 헤매다 도달하니 노인분들의 길이 무척 길었다. 그분들은 다 바빠 보였다.
한 분 한 분의 손에는 끌고 다니는 가방이 하나씩 들려있었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내 휠체어 앞으로도 모르는 척 끼어드는 분도 있었다. 여행을 와서 특별히 할 일도 없는 나는 바쁘신 분들에게 엘리베이터를 서너 번 양보를 하고 겨우 한참이 지나서야 앞에 섰다. 그때 한 여자분이 "이 사람이 먼저 타야 합니다" 하며 내 휠체어를 부여잡고 다른 분들을 막아섰다. 우와! 그분 덕분에 좁은 엘리베이터를 거의 혼자 차지했다. 엘리베이터에도 장애인 우선이라고 쓰여있었고 그 여자분처럼 점점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한 이해가 시민들 사이에 생기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지하상가는 미로같이 꼬불대며 복잡했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 서울행 전철을 탔다. 한가한 시간이라 전철에 사람들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휠체어로 아무 칸에든 마음대로 타도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역무원이 램프를 들고 뛰어와 설치해 주는 지정된 칸에만 탈 수 있었다. 그 후 역무원은 내가 내릴 역에 연락을 해 도착할 때쯤 그쪽 역무원이 램프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민망한 상황이었는데 우리나라는 그냥 내 마음대로 타니 너무 좋았다.
신길역에서 내렸다. 가끔 엘리베이터가 마련되지 않은 역들의 있다고 들었는데 신길역이 바로 그중 하나였나 보다. 하지만 계단 옆에 리프트가 달려있었고 사용방법을 읽으려 하다 보니 안내를 부르도록 되어있었다. 버튼을 누르니 바로 담당직원이 "내려가요" 한다. 건장한 두 사람이 왔다. 느리긴 했지만 안전을 위한 저속운행인 것 같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이렇게라도 이동이 가능한 것이 행복하다. 일을 마치고 오목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무사히 돌아왔다. 자유로움을 찾은 새로운 기쁨과 뿌듯함이 가슴속에 퍼졌다. 이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소아마비로 장애가 어려서부터 있었지만 2000년대 초까지 아무 보조기구가 없이 걸을 수 있었고 장애로 인한 불편함이 없었다. 그 후 좀 더 적극적인 활동성을 위해 휠체어를 탔고 현재는 파워 휠체어를 타고 있다. 현재의 파워휠체어는 특별한 램프가 달린 밴이상의 큰 차량이 필요해졌다. 처음으로 장애로 인해 활동반경에 불편함이 늘어났고 급기야 나는 비장애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장애가 되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파워 휠체어가 주는 편리함과 함께 지역사회를 마음대로 돌아다는 것에 제약이 생긴 것이다.
장콜이 없다면 나는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장콜 서비스의 긍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감사하고 싶다. 물론 더 많은 차량을 배치하고 원하는 시간에 마음대로 탈 수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장애는 불편한 것일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장애가 없다면 일반 택시로 이동하면 불편함이 적을 것이다. 나는 장애가 있고 그로 인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장콜을 이용해 불편하다면 그것은 장애의 일부라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동이 불가능 해진다면 그것은 차별인 것이다.
서울 장콜은 그나마 많은 택시들이 운영되고 있으나 지방은 장콜의 사용이 좀 더 제한적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공항, 병원등)에는 서울 장콜처럼 예외적으로 혜택지역을 넘어 한번에 갈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 운영을 넓이면 좋겠다. 광역 프로그램에서는 제한된 숫자의 사람들에게 하루 전 7시에 전화예약을 하여 서울 근교를 가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불가능"을 외친다. 택시운송이 각 지방정부 별로 운영을 하지만 장콜의 경우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운영을 지원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책이 책정되고 개선책을 마련하며 점차 발전해 나가야 한다.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변화가 당장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개선책을 주장할 필요는 있다. 장콜의 목표는 불편함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기본 이동권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고 감사하다. 장애가 초래하는 불편함을 이해하는 나로서는 현재 장콜로 인한 불편함이 그냥 장애인 삶의 일부로 느껴진다. 내가 자유롭게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는 현재의 서비스가 내에게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일은 인천 컨퍼런스에서 친구와 만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공항철도를 이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