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종교의 필요성
1.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다. 능력주의의 폐해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에 대한 많은 것들은 하나의 이미지로 정리되었다. 바로 ‘경주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함께 달리는 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달리는 경주마. 결승점에 다다른 후에야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하거나 무능함에 좌절할 뿐. 오랫동안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볼 수 없어 반성도 할 수 없는 헛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고 실제 내 주변은 다 이렇게 살았다. 그래 봐야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들 뿐이었다. 어쩌다 만나는 친척들, 오가며 인사하는 이웃들, 학교 가서야 만나는 친구들의 삶을 나는 잘 몰랐다.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머무는 곳은 학교 아니면 집이었으니까. 내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도 시간도 없었으니까.
3. 어머니의 절박함에 함께 시작한 종교생활을 통해 처음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아주 어린아이부터 9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각자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들으며 자랐다. 성인이 되어서는 직접 찾아가 대화하고 격려하고 서로에게 주어진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도전했다.
4. 인간의 삶을 억누르는 건 사회이기도 하고 사회를 이루는 우리들 각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핑계 삼아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구축하지 않도록’ 서로 지지해 주어야 했고, ‘가장 불행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내가 머무는 곳을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내가 다니는 곳에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다.
5.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 나온 엄마와 아이들, 부모님은 어릴 적 돌아가시고 형을 비롯한 친척들은 자신의 지능이 모자란 것을 이용하다 버린 나와 동갑의 남성, 조현병을 앓는 남성과 가족들, 척수 마비로 누워만 있어야 했던 남성과 가족들. 사업 실패로 빚에 시달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살아가던 두 아이의 아버지 등. 매주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나의 삶이 겹쳐졌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최선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6. 사회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소득의 격차를 늘려간다. 소득의 차이는 주거지를 분리시킨다. 직장에서도 마을에서도 다른 계층의 타인을 만나기 어렵다. 서로의 삶에 무관심하다.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사회의 문화는 내 앞에 주어진 과제에 몰입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타인은 커녕 가족을 꾸리는 것도 사치라고 여기니까.
7. 언론과 문화 예술로 ‘체험’하는 타인의 삶을 대하는 이들은 오로지 ‘관찰자’ 입장만 경험할 뿐이다. 다른 계층의 타인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필연적으로 혐오가 이어진다. 부적 편향은 본능에 가까우니까. 보이지 않는 타인의 삶을 함부로 여기기 쉬우니까. 소득과 상관없이 누구나 사람으로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기본적인 인간다움이 있다. 형편이 어렵다고 누구나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아니고 어마어마한 부자라 해도 개인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으니까.
8. 그렇다면 왜 이토록 사회적 갈등은 높아져만 가고 타인에 대한 각종 혐오는 넘쳐만 가는 것일까?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원인과 해법을 생각하게 된다. 공교육과 종교다. 선별교육 혹은 영재 교육은 능력 혹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개인들을 분리한다. 서로 다른 계층 혹은 능력을 가진 타인과 교류할 기회를 지워버림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경험할 무대를 박탈하는 것이다.
9. 교육의 목적이 높은 수준의 학업 성취인가 아니면 민주 시민성의 함양인가를 떠올려보자. 우수한 인재들만 모아놓은 집단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나 데이비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은 높은 수준의 학업 성취를 목표로 한 교육의 결과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10. 메트로폴리탄의 시대다. 더 많은 이들이 더 좁은 곳에 모여 산다. 이렇게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시민성이 아닌가? 시민성은 어떤 과정을 통해 길러지는가?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결국 다양한 계층 간 상호작용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마이클 센댈의 지적 역시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속으로 박수를 친 이유다.
11. 따라서 공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공교육을 벗어난 사회인이 되고 나서 다시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난다. 같은 또래, 같은 직업의 사람들하고만 교류한다. 나이, 성별, 인종, 직업, 소득, 장애 등의 요인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하는 기준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서로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 다른 성별의 타인들,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을 만날 기회도 시간도 없다.
12. 이 모든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제도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종교가 아닌가? 앞서 이야기한 내 경험처럼 누구나 종교가 있다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지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우리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귀 기울이게 하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일이 바로 종교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13. 따라서 나는 교육과 종교가 아동청소년은 물론 성인들의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서로에 대한 혐오를 없애기 위해 가장 필요한 수단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