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수 Mar 29. 2023

<애프터썬> 인공지능 시대의 영화

허회경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함께 들으며

인공지능의 시대다.

사람들을 만나면 인공지능이 대화의 화두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분명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가지고 올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희망보다는 걱정이 더 많다. 인공지능이 우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막연한 무서움 때문이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그 공포는 더욱 커진다. 창작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믿음이 있어 왔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고, 인간이 축적해 온 수많은 데이터를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속도로 학습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젠간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다.

영화 <애프터썬>을 통해 나의 주장의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아는 마음]

인공지능이 쓰는 이야기는 구조와 플롯에 의존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모든 영화에는 구조가 있다. 구조와 플롯은 인간이 축적해 온 중요한 경험이다. 플롯은 인간이 써내려 온 수없이 긴 역사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 왔고 구조는 우리가 영화를 즐기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인공지능도 이야기를 만들 때 이 구조와 플롯을 이용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구조와 플롯은 단순하고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그 미묘한 배치와 구성의 차이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 이야기의 구조는 방향이다. 방향이라는 의미는 그 안에 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 그 길의 모습을 언제 드러내는지에 따라서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전달된다.


<애프터썬>은 튀르키예 여행을 회상하는 '소피'의 이야기다. 관객은 이 영화가 회상의 구조라는 것을 영화의 후반부에 알 수 있다. 작가의 선택에 따라 회상이 드러나는 시점이 극의 초반일 수도 중간 지점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회상이라는 도착지는 동일할지라도 구조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로 이어진다.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애프터썬>을 여는 시작 질문이다. 영화는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회상의 구조를 선택했다. 질문은 11살의 '소피'가 아빠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시간이 흐른 뒤 성인이 된 '소피'로 간접적으로 답을 한다. 소피의 대답이 결국 아빠의 대답이 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시간의 간극에서 첫 번째 소피와 두 번째 소피를 만난다. 구조라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우리가 언제,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 두 번째 소피를 만나느냐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두 번째 만남이 훨씬 좋기도 하다는 것도. 그 ‘좋음’은 슬픔을 동반한 좋음인 경우가 많지만.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에서


우리가 소피를 두 번째 만날 때, 소피는 아빠의 나이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관객에게 슬픔을 함께 준다. 이해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대체로 그렇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의 도움 속에서 끝내 이해를 발견한다. 그 시간의 간격을 <애프터썬>은 정교한 구조와 그에 따른 시퀀스의 배치를 통해 표현된다.


영화는 정확히 소피가 무엇을 이해했는지, 그리고 과거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 전혀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피의 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데이터로는 치환되지 않는 우리 삶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구조는 그 마음을 아는 인간이 선택한 것이다.  


[장면을 모으는 감각]

이야기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에는 장면이 있다. 장면이 모여 영화가 된다. 그리고 장면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인간의 예측을 벗어난 일들이 생긴다.


인공지능의 작동원리는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한다. 알고리즘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이다. 인공지능에게 슬픈 장면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인공지능은 그 감정을 위해 일련의 쇼트를 선별하고 배치할 것이다. 목적이 선행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영화의 편집과 비슷하지만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할 수 없는 영화의 본질이 있다. 영화는 목적이 선행하지 않고, 어떤 과정 속에서 우연히 그 목적에 도착하기도 한다.


영화의 몽타주란 개별 이미지의 총합이 아닌, 완전 다른 것


슬픈 감정의 장면은 단순히 슬픈 쇼트 A, 슬픈 쇼트 B 단순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몽타주는 A B 만나 C 되는 것이며, C 슬픈 감정을 전달하지만  개별 쇼트 A B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종종 영화의 편집은 예상을 벗어난 결과를 도출한다. 편집의 과정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아주 작은 프레임 수의 차이로도 다름을 만들기도 한다.  방식은 지극히 인간의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알고리즘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분명 <애프터썬> 편집 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원래의 목적 이상을 성취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애프터썬> 속 몸의 장면들에서 그런 감각적인 편집이 잘 드러난다. 아빠가 보여주는 어떤 몸짓들이 하나의 쇼트로 길게 재생이 되곤 하는데, 관객이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충분함을 넘어서 길게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분명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쇼트가 그 이상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준다. 어떤 쇼트를 선택하는지 만큼이나 그 쇼트를 얼마나 오래 보여주는 것 역시 의미를 만들기 위해 중요하다.


몽타주의 측면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은 아빠의 표정을 보고 다른 분석 결과를 내릴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에게 <애프터썬> 속 아빠의 표정을 분석하라고 하면 행복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다. 단순 통계적이고 표면적인 비교를 한다면 아빠는 행복한 것이 맞다. 소피 앞에서 아빠는 행복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슬픈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빠의 웃는 표정이 나오는 장면들이 아빠가 뒷모습으로 흐느끼는 장면과 만나서 형성하는 몽타주로 인해 그 웃는 표정은 완전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떤 웃음은 슬픔이 되고, 어떤 무표정은 절규가 된다. 영화라는 형식과 인간의 감각이 만나서 가능한 일이다.


[영화의 시간, 우리의 기억]

인간과 인공지능의 시간성은 다르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된 시간 속에 산다. 인공지능의 시간은 오직 현재에 머문다. 인공지능이 학습한 데이터를 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공지능의 데이터에는 육체적 경험이 생략되어 있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선별적으로 선택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들의 고민이다. <애프터썬>이 표현하는 것 역시 우리 인간들의 고민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숨 같은 것을 내뱉고
사람들을 찾아 꼭 안고선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


허회경의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서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한숨 같은 것을 내뱉고, 사람들을 찾아 꼭 안고선,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이 살아가는 거라고. 허회경 노래의 대답이 <애프터썬> 속 소피가 살아가는 것과 무척 닮아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나이가 된 소피 옆에는 아버지가 없다. 그러나 소피 옆에는 소피를 안아주는 애인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한숨처럼 내뱉고, 현재를 채워줄 사람과 함께하며 미래에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소피의 삶이며 우리의 삶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되기도 한다.

시간은 나라는 존재를 이어주며, 나와 당신을 하나로 묶어준다.

지금 당신은 없지만 내가 보낸 시간 속에는 당신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데이터가 아니라.

기억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마음'과 '감각' 그리고 '기억'이라는 인간의 속성을 정말 인간 고유의 것이고 대체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 단어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인공지능은 지금 단계보다 더욱 발전할 것이고, 영화를 인간 이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이다.


영화의 구조 속에서 이 장면을 '언제' 배치할 것인지.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오래 그 쇼트를 보여줄 것인지.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가 겪은 '어떤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올 것인지.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아는 시간의 감각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그 시간은 인공지능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시간 속에 살고, 그 시간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창작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온전한 의미를 얻게 된다.


그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니셰린의 밴시> 이 이야기를 사랑으로 읽을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