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대통령이 운명이었을까?

그 요인과 배경은?

by 팟캐김

대한민국 21대 대통령이 된 이재명.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점이 달랐기에 1970~80년대 운동권의 대부 김문수를 물리칠 수 있었고, 그 전에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무후무한 총선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대통령이 그의 운명이었을까?


◇ 가난한 집의 똑똑한 자식


우선, 이재명 본인의 뛰어난 지능을 들 수 있다. 학습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 1980년대의 중앙대는 지금도 이름난 학교지만, 당시에는 더욱 명문으로 여겨졌다. 검정고시 이후 학력고사만으로 입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학습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윤석열이 입학한 서울대 법대보다 낮게 평가될 수는 있으나, 만약 이재명이 청소년기에 공부에만 집중했다면 그만한 입시 성적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현재의 이재명을 있게 한 결정적 요소는 ‘사법고시’였다. 당시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사법고시가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재명도, 윤석열도 모두 사법고시 합격 이후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평범한 동네 아저씨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이 하나의 시험이 사회 지도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그의 ‘서사’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히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졸 출신 변호사로 ‘바보 노무현’이라 불릴 정도의 서사를 가졌고,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재정권에 맞섰던 투쟁 서사가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원에서 사장까지’의 성공 스토리,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막강한 후광이 있었다. 결국 지도자는 자신을 상징할 수 있는 서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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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에게는 ‘소년공 출신 인권변호사’라는 강한 서사가 있다. 그는 프레스기에 손목이 눌려 장애를 입었고, 자살을 시도할 만큼 절망적인 시기를 겪었다. 이 이야기는 수천 년을 이어온 ‘영웅서사’ 구조와 닮아 있다. 특별하게 태어난 아이가 고된 환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은인을 만나 성장하며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서사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누구나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며 어엿한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명에게는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더해져 주목도가 높아졌다.


◇ SNS, 스마트폰의 시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사가 대중에게 알려진 건 2000년대 초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는 신문과 방송이 전부였고, 주로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중심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치권도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됐고, 주변 인물들은 좀처럼 주목받기 어려웠다.


인터넷 시대는 이런 구도를 바꿨다. 다양한 사람들의 글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알려졌고, 자발적인 시민들의 선거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재명의 시대는 한 발 더 나아간 ‘쌍방향 소통’의 시대였다. 2000년대가 인쇄 매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채로운 정보가 빠르게 확산된 시대였다면, 이재명이 알려지기 시작한 2010년대는 쌍방향성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정치인이 직접 지지자들과 소통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터넷 게시판에서 정치인의 감동 스토리를 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팬덤으로까지 확장되는 ‘일대일 관계성’이 가능해졌다.


이재명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2010년대는 모바일 시대가 열리던 때였다. 당시 주류 정치인들은 여전히 방송과 신문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블로그나 트위터는 보조적 수단이었다. 이외수처럼 트위터에서 활약한 유명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유명세를 갖고 있었다.


이재명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유명하지 않았다. 성남시장으로 시정 활동을 하면서 SNS를 적극 활용했고, 자신의 소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같은 성과를 내더라도 이를 드러내는 사람의 성과가 더 부각되는 것처럼, 이재명은 성남시장에서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가 얼마나 SNS에 공을 들였는지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2014년 세월호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을 때, 당시 원내대표였던 박영선 의원 옆에 앉은 성남시장 이재명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고 ‘좋아요’를 눌렀다. 주류 언론이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때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에게 보인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렇게 쌓인 신뢰가 그의 팬덤이 되었다. ‘개딸’ 현상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주류에 대한 거침없는 반격


이재명은 애초부터 비주류였다. 사회 기득권과도 거리가 멀었다. 교복조차 입지 못한 채 공장에 다녀야 했던 그의 삶은 ‘비주류’ 그 자체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가진 주류에 대한 인식이다.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저항과 항거로 표출됐다.


성남시장 시절 국정감사장에서도 그는 보수 정당 정치인들, 즉 주류 정치인에게 거침없이 맞섰다. 주눅이 들어 있던 다른 지자체장들과 달리 그는 할 말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진보 지지층에게 ‘사이다’처럼 통했다.


한국 사회에는 핍박받는 존재에 대한 동정심이 깔려 있다. 윤석열이 문재인 정부 시절 검찰총장에서 전국적 보수 진영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도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 덕분이었다. 민주당 정치인에 맞서 주목을 받은 정치인으로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김문수 등이 있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 역시 민주당에 대한 강한 비판을 통해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이는 보수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합했다.


이런 흐름은 정치뿐 아니라 프로레슬링 같은 대중 콘텐츠에서도 통한다. 강자에게 핍박받는 약자가 끝내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서사 말이다. 실제로 프로레슬링에서도 신인을 띄우기 위해 기존 챔피언에게 도전시키는 각본이 자주 사용된다. 비록 패하더라도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된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은 ‘잘 싸운’ 정치인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의 싸움 상대는 윤석열이었다. 오만과 불통의 상징이 된 윤석열과 대립하며 그는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윤석열의 오판이 결과적으로 이재명을 도운 셈이기도 했다. 2024년 총선 참패 후 윤석열이 계엄이 아닌 개헌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국회라는 정치의 무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윤석열이 이재명의 상대였다는 것 자체가 이재명에게는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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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리하자면, 이재명은 가난했지만 똑똑했고, 1980년대 사법고시를 통과하며 ‘선택받은 소수’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안에서도 그는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택했고, 기득권에 맞서는 태도는 그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시대도 그를 도왔다. 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치 기반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대통령이 되는 ‘화룡점정’의 순간에는 윤석열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서사를 스스로 만들어내며, 이재명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결정적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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