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주기’ 효과 큰 사회적 약자일 수록 이자↑ 부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인 2009년 9월 30일 금융소외 계층의 자활을 돕는다는 취지로 미소금융재단이 출범했다. 정부가 기존 소액서민금융재단(휴면예금관리재단)을 확대 개편한 것.
그해 12월 15일부터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금융소외계층이 쉽게 창업할 수 있도록 창업·운영자금을 무담보·무보증으로 지원하는 소액대출 사업이 시작됐다. 이른바 빈곤층의 자립을 돕는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딧(Micro Credit)이다.
이런 마이크로대출은 신자유주의자들한테 특히 환영받았다. 전세계적인 트렌드이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단순히 복지를 퍼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게으르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주고, 그들 스스로 자활할 수 있게 만들자는 취지였다.
쉽게 말해 가난한 자들이 본인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의 환영을 더 받았다.
◇착한 자본주의의 표상이었던 그라민뱅크
때마침 눈에 띄는 결과물도 있었다.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유누스와 그가 이끌던 그라민뱅크였다. 마이크로대출의 원조격인 그라민뱅크는 방글라데시 빈민층에 소액 대출을 해주면서 그들의 자활을 도왔다.
원리와 과정은 이랬다.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의 가장에게 좌판을 열 수 있는 돈을 빌려준다. 살인적인 사금융 금리보다 훨씬 싼 돈을 담보 없이 신용대출을 해주는 것이다.
가장은 이를 자본금으로 장사를 시작하고, 돈을 벌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물고기를 주지말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낚싯대를 빌려줘라’가 된다.
그라민뱅크의 연채율이 2% 미만이란 점도 주목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신용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미소금융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기업인 출신으로 신자유주의 신봉자나 다름없었던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그의 주변인들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겁박으로 점철됐던 그라민뱅크의 신화
그라민뱅크의 신화는 깨졌다. 그라민뱅크의 연체율 1%는 가난한 자들을 위협하고 협박해 얻은 숫자일 뿐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 사회에서 가장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주된 타깃이었다.
이는 2015년 11월 한국에도 출간된 바 있는 ‘가난을 팝니다’(라미아 카림 저, 박소현·한형식 해제)에서 잘 드러난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채무자가 된 여성이 어떻게 희생이 되고, 그라민뱅크의 성과가 어떻게 분식(粉飾)됐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인 라미아 카림은 그라민뱅크와 같은 마이크로금융기관으로부터 받은 빈민 여성들이 겪는 현실을 차분히 전했다. 이들 기관이 돈을 빌려준 빈민 여성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퍽 충격적이다.
책에 따르면 마이크로금융기관은 이들 여성들이 돈을 못갚게 될 때를 대비한 ‘망신주기’와 ‘겁박’을 무기로 갖고 있다. 여성을 향한 명예살인이 자행되는 그 사회에서 ‘망신주기’는 해당 여성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빈곤 여성은 더 큰 금리를 물고 이들 기관의 돈부터 갚아야 한다. 98% 이상의 상환률의 허상인 셈이다.
더욱이 이들 여성은 여러 아이를 키우면서 가족들을 부양한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도망갈 염려가 거의 없는’ 이들이었다. 마이크로금융기관은 이런 점도 철저히 이용했다.
이는 마이크로금융기관들의 이윤으로 이어진다. 이들 기관에 투자한 물주들은 쏠쏠한 이윤을 챙긴다.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의 희생을 발판 삼은 것이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은 더 심각해졌고,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의 부는 더 커졌다.
◇‘아가씨 대출’에서 나타난 저열함
한국이라고 다를까. 이른바 사회적으로 약점있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대출 상품이 고이율·저위험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지난 2012년 모 경제지에는 ‘KB지주 ’아가씨 대출‘ 아깝네’라는 기사가 나왔다. 부실대출로 말썽을 빚었던 J저축은행을 인수한 KB저축은행이 ‘마이킹 대출’을 파산재단에 넘긴 것을 놓고 쓴 기사다. 내용인즉슨 금리 높고 부실률 낮은 우량대출인데, KB저축은행 입장에서는 아까울 수 있다라는 얘기다.
‘아가씨 대출’이란 것은 무엇일까. ‘현실문화’에서 나온 ‘레이디크레딧’(김주희 저)를 보면 J저축은행이 유흥업소 업주들에게 실행한 대출을 의미했다. 주된 채무자는 사실상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마이킹은 일본말에서 유래됐는데, 성매매 업소에서 신용을담보로 선불금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채가 여성을 옭아매는 역할을 한다.
이 부채는 한국 금융의 선진화와 함께 금융화된다. 과거 여성이 남긴 차용증을 증권화(혹은 담보로 대출을 받고)하고 이 와중에 금융사들이 전주로까지 나선 것이다. J저출은행이나 일부 대부업체들은 직접 대출 상품까지 만들어 운영했다.
이런 대출 상품도 결국은 ‘망신주기’와 ‘겁박’을 깔아뒀다. 과거 사실을 숨기고 싶은 여성들에게 ‘폭로’라는 겁박이다. 남의 시선을 유난히 의식할 수 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폭로적 겁박은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2000년대 중후반 TV광고에 나왔던 ‘여성전용 대부상품’도 같은 맥락이다. 저자 김주희는 남성보다 여성에 대한 채권추심이 더 수월했다고 전하고 있다. 수익도 다른 상품보다 좋았다.
◇누구든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
부채는 그 사회 가장 약한 계층의 사람들에 기생하기 쉽다. 이들이 버텨주고 꼬박꼬박 돈을 갚아줄 수록 전주들은 돈을 번다. 채권자 입장에서 억압하기 쉽고 많은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채무자일 수록 고수익을 누릴 수 있다.
설령 자본주의가 아름다워진다고 해도 이런 구조는 바뀌기 힘들다. 금융은 ‘양날의 검’처럼 채무자들을 옭아맬 것이다. 정부 당국의 감시의 눈이 없다면 말이다.
미소금융 이후 정부는 여러 서민금융 상품을 내놓았다. 서민들의 부채 부담을 줄여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금융 소외자들은 남아있다. 자본주의의 탐욕은 언제든 이들을 노릴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 이미 당했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